◎ 이름:Saroni (saroni@orgio.net) ◎ 2001/2/16(금) 01:10 (MSIE4.01,Windows95) 211.51.75.252 800x600 ◎ 추천:39 "Bitter" 1. "Bitter"-1. 2000.01.04 by saroni 나는 연필화가 좋다. 그렇게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삶이란 것이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하지. 반면 수 묵화를 그리는 진영이놈은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모두 함부로 낙서를 하기 시작하겠지. 차라리 먹의 화필처 럼, 인생에 한 번 획 그으면 다시는 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구. 그리고 아직 남은 여백이 많아, 결국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의 조화이니까, 현우. 선 하나 하나에 그렇게 마음 주지 말도록 바래. 하지만 나는 부분과 전체를 모두 사랑한다. 그래서 내 그림은 데생보다 정밀묘사에 가까운지 모른다. 그 중의 선 한 자락, 일단은 매우 생생하고 귀여운 것 하나를 잡아 들여다보자...... 그렇게 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그 선에서 이 선으로 이어지고, 깔아 놓은 획들이 겹쳐져 색을 가진 면을 이룬다: 그런 식으로, 내 속에 서래를 기억한다. 2학년의 미술부 첫 시간은 자기 소개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 서래'입니다.] 진영이가 씨익 웃으면서, ['전설의?' 전설의 사나이인가?] 라고 한 순간 미술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날부터 서래에게는 '전설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뿐 만 아니라, 서래가 그리는 그림은 '전설의 그림' 해 온 숙제는 '전설의 숙제'로 불리었고, 실제로도 녀석은 전설에 가까울 만큼 데생에도 공부에도 능했다. 게다가 성격도 워낙에 서글서글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원체 온 학교 안에 서 전설적인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으니, 미술부의 마스코트가 된 것은 당연했다. 또한 표진영의 장난감, [물어!] 진영이가 담뱃갑에서 한 개피 남은 돛대를 공중에 던지며 외치자, 서래가 반사적으로 뛰어올라 덥썩! 입으로 받았 다. 그리고는 머리를 감싸쥐고 연극적인 동작으로 구석에 박혀서 우는 시늉을 한다. [으아악----진영이형!! 또 습관적으로 해 버렸쟎아!!! 너무해~~!!!!!!] [말이 많군, 전설의 사냥개.] [난 개가 아니란 말야~~ 김정호!! ㅠ.ㅠ 나의 인간성에 대해 증언을 좀 해 줘!] 녀석은 말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정호를 등 뒤에서 껴안고 훌쩍거렸지만, 여느때처럼 [벼엉신.] 이라는 차가운 한 마디만 듣고, 도깨비불 서너개를 단 채 말없이 미술실 저 - 쪽 끝으로 사라져 간다. 그러나 표진 영은 또 다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것을 흔들어 보인다. [네 라이터 여기 있다.] 서래는 머리를 감싸쥐고 코믹한 주저의 몸짓을 보이다가, 결국은 이쪽으로 살금살금 다시 온다. 진영이는 경계태세 를 취한 서래에게 상냥한 미소를 유지한 채, 녀석이 사정거리내?접근하자 [손!] 그러자 녀석은 당장에 강아지로 변하여 꼬리를 흔들면서 손을 덥썩 올려 놓고, [안돼--!! 이제 몸에 배어 버렸어!!!] 라고 외치며, 다시 절망에 빠져 구석에 가서 쓰러진다. 머리에 큼직한 땀방울이 보이는 것이, 가히 만화의 한 장면 이다. 서래 녀석은 유달리 검은자위가 많은 생기있는 눈에는 늘 장난끼가 반짝였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한 채 잠시도 가 만히 있질 못하는 것이, 진영이 말대로 도베르만의 강아지와도 비슷한 데가 있다. 미술부원들은 각자의 이젤에 앉 은 채 커다랗게 웃고 있고, 진영이는 서래가 문 담배에 불을 붙여 주면서 잘했다고 머리를 토닥거리다가 으르렁거 리는 서래에게 물릴 뻔 한다. 미술실에는 햇살이 들고, 빛나는 웃음소리, 고교시절의 아름다운 한 장면, 착하고 순진한 아이들. 지극히 랜덤한 운 명의 이벤트들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순수를 지킴받은 내 친구들. 그 속에서 나는 미소짓고 있지만, 눈은 나도 모 르게 건너편 벽에 걸린 시계로 향한다. 기실 그들 안에 속한 인간이 아니었다. 이미. 지금도. 어쩌면 아주 오래 전 부터. [......하악........읏...!] [그래...현우. 그렇게, 소리를 내 봐. 네 목소리가 좋아.] 귓전에 들리는 열띤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산이의 어깨를 꽉 껴안고 허리를 들어올리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말 았다. 그러자 녀석은 삽입운동을 잠시 멈추고 나를 애태우기 시작한다. 아주 잘 알고 있는 내 가장 예민한 곳들을, 애무해 줄 듯 피하고 뒤로 미루어 가면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주변부를 빙빙 돌면서 손과 발에서 주요 부위 로, 뼈에서 살로, 바깥에서 안으로, 피부에서 점막으로. 젠장...아주 미친다. 참지 못해 끌어당기자 내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 눌러놓은 채 애무를 계속한다. 음모와 그 아래 치골의 마찰. 녀석의 입술과 혀가 부드럽고 리드미컬 하게 다가들었다 멀어져 가고, 내가 신음 외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수 없을 지경까지 되도록 갖고 논다. [아아윽..] 거의 내 것 같은 그의 손, 익숙한 냄새와 감촉인데도 녀석과의 잠자리는 매번 달라지는 노래와도 같다. 그 날의 기 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모티브 A에서 B로 흐르고 다시 A'로 가며, 때로는 예정된 쾌락의 선율을 타고 절정에 이르지만, 때로는 갑작스런 변주가 이루어진다. 놈은 내가 악기라도 된 듯이 그 능숙한 손가락으로 연주하 고, 나는 나름대로 때로는 산이를, 때로는 그 위에 겹쳐지는 다른 이미지를 내 깊은 곳으로부터 스케치한다. 어쨌 든 새겨 놓고 나면 그것은 산이의 얼굴이다. 고동치는 맥박이 되어 흐른다. 프레임에 잡힌 정지된 그림의 형태로, 나는 기억한다 학교 근처의 담배 냄새 가득한 비디오방, 제대로 본 비디오는 한 편도 없다. 호화로운 어둠이 꽤나 시끄러웠던 어느 락카페의 은밀한 구석자리, 해 질 무렵의 호텔 룸, 또는 늦 은 저녁의 어둑한 과학실. 정사를 끝내고, 산이는 해골 모형을 어루만지며 무슨 생각엔가 빠져 있었다. 그 옆모습 은 얼마나 익숙한지. 그리고 시시각각 지평선으로 가라앉는 태양에 의한 미묘한 빛의 각도에 따라 얼마나 낯선 얼 굴로 변해 가는지. 어느 날 진영이가 물었지, 자기 첫인상이 어땠냐구. 나는 그냥 웃어 보였지만, 실은 말해줄 수가 없었어. 기억이 나 질 않았거든. 진영이가 2학년으로 전학을 왔을 때 당시, 나는 산이를 버텨내는 것 만으로도 힘에 부쳤었으므로, 다 른 사람들에게 관심 가질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더랬지. 진영이가 동양공고 짱이었든, 미대 가겠다고 공고에서 인 문계로 전학한 놀라운 놈이든, 소문들도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3학년 올라가서 같은 반이 된 놈 들 이름과 얼굴을 전부 매치시키는 데에도 거진 한 학기가 다 걸렸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길에서 나를 아 는 체 하는 사람을 만나면 미안할 정도로 당황해 버려. 왜들 그렇게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이름들을 갖고 있는 것 이지? 고교 때 선생님들 이름도 정말 외기가 힘들었었지. 하긴...수업시간에 늘 칠판 위에 눈으로 그림만 그리고 있 었으니까. 머리 속의 가상 공간에서 손가락과 연필이 움직여, 산이 얼굴의 그 예술적인 곡선들을 띄워올리곤 하였 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술실로 달려가서 이젤에 머리를 파묻었지. 쥴리아노, 비너스, 아폴론, 그리고 헤 르메스.. 그 입가에 띤 평화로운 미소는 몇 번을 그려도 내가 소유할 수 있기는커녕,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지. 얼마나 신비로운지: 단지 속이 텅 빈 석고 주물 표면의 곡선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야. 그 표정은 마치 산이 같았 어. 산이의 첫인상이라면 아주 뚜렷해. 번개라도 맞은 기분이었거든. 그 애 이름이 인상적이듯이,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존재였지. 산이를 처음 보는 사람이 누구든 그렇듯이, 나도 녀석을 처음 봤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 하게 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 애티나는 신입생들 틈에 혼자 침착하게 앉은 옆모습이, 말하자면 어른 같았 어. 마치 모노크롬 회화 전시회장에 잘못 걸린 라파엘로의 성모화 같았거든. 온아溫雅, 그것이 그나마 가장 근접한 표현이야. 3년 내내, 한 번 미소짓는 것 만으로도 주위에 폭풍을 일으키고 다니는 주제에, 자기 자신은 언제나 그 핵 답게 평온하고 우아했지. 덕분에 녀석의 자기장에 끌려든 사람들은 모두 미쳐 버렸어: 내 경우는 집에 가서 스 케치북 가득히 그 얼굴을 그려 댔지. 어느 여름날, 나는 주번이었어. 내 파트너는 민규였는데, 그 녀석이 남아서 주번 작업 같은 걸 할 리가 없었겠지. 혼자서 교실 뒷정리를 하고 나니 학교에 아무도 없는지 매우 조용하더군. 평일과 휴일 사이, 나른한 토요일 오후의 공기는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미술 학원에 갈 시간이 벌써 한참 늦어서, 나는 서둘러 가방을 메었지. 그런데 그 때, 문이 드르륵 열리고, 산이가 들어왔어. 뚝, 뚝. 교실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져 어두운 자국을 만들며, 돌의 표면을 천천히 적셨어. 아아, 그 때는 물론 머리가 짧았 지.. 지금은 그 목덜미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그 녀석 머리 꼭대기에서 부터 신발 끝까지 완전히 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는 사실이야. 하얀 여름 하복 상의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속살이 다 비쳤지. 그리고 주먹은 피투성이였어. 나를 보더니 생긋 웃더군. [강현우, 아직까지 주번 일 하는 중?] [..으응..]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속눈썹이 긴 눈을 아래로 깔았다가 다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에 빠진 생쥐 꼴이지? 좀 더워서, 찬물을 뒤집어썼거든.] [그 피는?] [걱정할 것 없어. 내 피는 아니니까.] [....싸웠니?] [응.] 그리고 침묵이 흘렀지. 별로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어. 그가 알아서 말해주거나, 그게 아니라면 묻지 말 라는 뜻이니까. 게다가 녀석이 싸움을 했다 해도 별 일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 학생회장은 공부에 방해 된 다고 사절했지만, 산이는 항상 전교 5등 안에서 노는 톱클래스의 우등생이었거든. 여기까지는 그래도 일상적인 대 화였지. 같은 반에, 안면도 있고 말도 몇 마디 나눈 적이 있지만 그다지 친하지는 않은 급우간의 형식적 대화. 그리고 어색함. 나는 필사적으로 무슨 말을 하면 좋을는지를 고민했지. 여기 바로 윤 산이 있쟎아, 참 친해지고 싶었었는데 늘 사 람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말 걸어 볼 기회도 없던 녀석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목구멍에 빵이라도 한 조각 걸린 듯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거야 그냥. 산이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바랬는데, 그저 서서 창 밖을 보고 있더군.... 하다 못해 날씨 이야기라도 해 볼까 했어. 주먹에 땀을 쥐고, 막 말을 떼려는데 그러나 그 순간, 열린 창으로 파리가 한 마리 날아 들어왔어. 파리라니 우습지, 나비였다면, 하다 못해 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영화 속이라면 몰라도, 우리 삶에서 일이 그렇게 멋있게 돌아가지는 않는 것인가 봐. 어쨌든 슬프게도 그건 큼직한 한 마리 파리였어....'윙~'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지. 온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평화롭 기 그지 없던 토요일 오후의 분위기, 나른한 산이를 산산이 부수어 주었어. 그런데 그가 그러더군. [예쁘다.] [응?] [예쁜 파리쟎아,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것이, 마치 스카라베(이집트의 갑충석) 같아.] 나는 스카라베가 뭔지 몰랐지만, 어쨌든 파리를 예쁘다고 하는 녀석의 말이 무척 신기했다. 다들 파리라면 우선 불 결한 연상들을 떠올리게 되어서, 파리를 파리 자체로 바라보아 주지는 않지 않는가. 과연 그 곤충은 나름대로 고운 색을 갖고 있었다. 그 진지한 눈길이 너무 새로워서,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나오더라구. 그러자 산이도 따라 웃 었어. 그리고, 그 말을 했지. [현우야, 나랑 하자.] [....응? 뭘?] [섹스.] 그 한 마디로 내 사춘기는 완전히 파토가 났다. 지금은 그 때로부터 2년 후 산이의 방, 시점에는 신경 쓰지 말아 주시길. 내게는 과거와 현재가 다를 바가 없다. 마찬가지로 시작과 끝을 잘 분간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 날 산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 해도 매우 신기하다. 진영이는 사람은 평생 변화하는 존재라고, 멈추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매 초 흘러가는 존재라 고 말하지만, ...음, 내게는 조금 어려운 개념이다. 어쨌든, 진영이가 말하기로는, 내가 윤 산에게 그 말을 한 다음부터 그림 솜씨 가 조금은 나아진 셈이라고 했었지. 산이는 몸은 비록 섹스 후의 체액에 흠뻑 젖었지만 참 얌전하고 조용한 얼굴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런 녀 석이다. 선생님들 앞에서는 성처녀 같은 얼굴로 순진한 미소를 짓지만, 주머니 속에는 항상 칼이 들어 있다. 녀석 의 옆모습은 정말이지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묘사한 석고상과 비슷한 데가 있다.. 감정이 부재한 평안과, 자기 확 신에서 오는 아찔한 정적. 지금은 녀석이 정신적으로 뭔가가 결핍된 불구자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자신감, 그 자유로움, 어떻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녀석의 상식을 초월하는 에너지는 아주 단순한 논리에 따르는데, 바로 이기심이다. 지금도 산이는 늘 그렇듯이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마도 몇 시간 동안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해하지 않을 놈이다. 왜냐하면 그 에게 있어서는 지금 저 이글거리는 노을이나 길바닥에 흩어진 쥐의 시체나 완전히 동등하게 아름다운 것들인데, 그 이유는 그 모두가 산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세상 전부가. 그래서 그는 본질적으로 만물을 사랑하고 있으 며, 동시에 그 중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이 넓은 집에 밤새 둘이 신음하며 뒹굴어도 부모님은커 녕 가정부도 본 적 없다는 것 뿐. 산이에게 물어봐? 뭘? 산이가 달콤하게 웃으며 무슨 답을 해 준다 해도 과연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혹은 거부할 수 있을까? 산에게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란 개념이 없어서, 현실은 그의 마음 속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한 미궁 속에서 희석 되고 채색되어 장난감이 된다. 따라서 나는 "나를 좋아해?"라고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의미 없는 메아리 뿐이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그 질문은 앞으로도 영영 내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겠지. 옷을 챙겨 입기 시작하자 그제야 산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입에 말보로 레드를 문 채 [어, 현우야, 오늘 자고 갈 것 아니었어?]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전히 물로 씻어낸 듯이 청초한 그 눈동자에 가슴이 ' 짱'하고 아려 왔지만, [산. 우리 이제 끝내자.] 산의 얼굴에는 그런 대로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일단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를 한 쪽 으로 기울이고 나를 쳐다보았다. 관찰하는 듯한 표정이 잠시 나타났지만 다시 놀란 표정으로 바뀐다. 가슴이 아릿 한 느낌에도 불구, 마음을 굳세게 먹었다. [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수가 죽었어. 알지?] 그는 몹시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다. 거의 완벽하다, 눈썹 사이와 눈 언저리에 주름이 잡히고, 입술 끝이 내려가 다 물리면서 눈이 어둑어둑해진다. 나는 잠시 저 표정이 약간이나마 진심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억지로 빠 져 본다. 나에게 약간의 집착이라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지 적어도 은수를 위한 생각 한 토 막을 갖고 지어 보이는 표정일 것이라는. 보통 고교시절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싸움들은 노는 애들이 아닌 '일반인'들과 별 관련이 없기 마련이다. 대개 신 학기가 시작되면 학년별 짱의 결정에서 시작되어 서열이 좌악 정해지는 싸움이 잠시 있고, 선후배간 분위기를 잡 기 위한 치고받음이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애들 간의 일상적 주먹다짐 외에 교내에서 벌어지는 혈투는 전무하다고 봐도 좋다. 학교간의 싸움은 당구장이나 술집 등에서 발발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데 드나드는 애들이란 뻔하 므로, 대개 저희들간에 해결을 보고 만다. 개중 정말 무시무시한 것은 '짱'간의 세력다툼인데, 누가 최고의 수컷이 냐 하는 것을 가리기 위한 것이며, 또한 일반인들과 별세계의 전설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보통 아이들이 휘말릴 때가, 가끔 있게 된다. 그런 신화들을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 듣고 두근거리고, 주제 도 모르고 위험한 불빛에 매혹되어 다가갔다가, 너무 가까이 간 나머지 부나방처럼 산화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은수처럼. 은수는 보기 드물 정도로 보통 애였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평범했다. 꽤 예뻤지만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고, 상냥했지만 천사같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공부도 그런대로 잘했지만 늘 반에서 8등이나 9등을 하는 타 입이라고나 할까. 산이를 죽도록 쫒아다닌다는 것 외에, 그 애에게 그다지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 산이를 좋아하게 되었을까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은 없다. 윤 산은 누구든 좋아해 버리게 되니까. 단지, 애들이 너 호모냐고 놀려댈 정도로 노골적으로 따라 다니는 용기가 신기할 뿐이었다. 별로 말도 나누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오히려 산이와 돌아 다니는 일이 적었거든. 그 애가 산이를 보는 눈은 동경 그 자체 였고, 애처로울 정도로 그의 등을 좇곤 했다. 산이는? 은수가 귀찮다고 그걸 나한테 말하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 도 오는 자를 내치지는 않는 산이였기에, 어디든지 달고 다녔다. 매점에 갈 때도, 특별활동 할 때도, 서클 모임에 도, 패싸움 할 때에도. 남자애들의 패싸움이란 놀랄 정도로 단순한 일로 시작된다. 이 모든 지긋지긋한 사태가 시작된 것은 양명고 대 한 상고의 농구 시합이 있던 날이다. 한상고와 싸운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나았을 텐데. 우리 학교가 졌고, 애 들은 모두 운동장에서 뒤풀이를 했다. 산이는 얌전하게 영문학 연구 서클에서 선생들과 웃고 있었지만, 해가 진 후 에는 똑같은 미소를 술집에 앉아서, 서클의 한터프 하는 녀석들 사이에서 짓고 있었다. 나는 보통 그런 자리에 잘 가지 않는데, 그 날은 어쩌다 미술학원 가는 길에 산이와 마주친 때문으로 그리 되었다. 그 유명한 박정규, 유상준 등은 물론이고 학교에선 얼굴도 보기 힘든 허경민, 이름만 대도 웬만한 날라리들은 쫀다 는 주수현, 우리 학교 짱이고 정학을 밥먹듯 당해 결국 일년 꿇은 황윤토 등등, 날고 기는 별들의 회합이었다. 그 리고 실제로 그 중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것이 산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공부 잘 하는 놈이라는 이례적 인 존재라서가 아니다, 놈이 싸우는 걸 딱 한 번 봤는데,, 지금 서클 놈들이 아무리 존경스런 눈빛을 하고 있더라 도, 감히 쳐다보는 것 자체가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무슨 말을 해도 경청을 받고, 결코 어떤 반박도 없 고. 윤토형이 짱이라는 것은, 녀석이 서열 따위의 유치한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일 것이다. 아니면 놈이 배후로 남 아 있는 것이 낮의 생활에도 도움이 된다고 결정했던 것이었든지. 그렇게 산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녀석들 속에 녹 아 있었다. 수업 시간에 칠판에다가 수학 문제 풀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싸움 얘길 했다... 그런 것이 산이의 게임 이었다. 진실을 짓밟고 감추는 놀이. 그 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다들 우르르 나가 보니 서클 애들 둘이 머리 노란 양아치 둘과 맞붙어 으르렁대고 있었다. 양아치들은 이 인파와 멤버들을 보더니 파랗게 질려버렸다. 알고 보니 정말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공중전화를 너무 오래 쓰고 있었다나. 모든 싸움은 이런 걸로 시작이 되곤 한다. 그 놈들은 금방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이 숫자에서는 일초도 뻗대지 않는 것이 현명한 짓일 터이다. 사과를 받고, 그냥 보내 줄 분위기였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두고두고 그 날을 곱씹듯이, 윤토형도 그 리할 것이다. 그러나 산이가 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산이의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산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 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윤토형이 산이를 쳐다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산이는 알고 있었을 게다..어떤 결과가 벌어질 것인지. 그러나 녀석은 당시 평화로운 나날들에 한창 심심해 하고 있었고, (그 전 날 나를 안을 때 꽤나 거칠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산이는 사람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 말 한 마디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 긴 속눈썹 아래에서 눈 으로 실을 잡아당기면 마술처럼 일들이 터지는 것이다. 아마 눈으로 맥주를 마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쪽에 만 원 걸 수 있다. 진짜 악마거든. 윤토형은 당시 산이한테 매우 민감해져 있었는데, 어떤 녀석들은 통상적인 파워게임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 고 있었다 윤토형이 은수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을. 은수를 공연히 눈엣가시처럼 못살게 굴면서 저 녀석 질색이라 고 하곤 했는데, 누가 싫어하는 애 괴롭히면서 벌개져서 말을 더듬냐? 자기네 짱이 남자애를 좋아한다니 딴 애들 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지만, 내게는 훤히 보였다: 그건 어린 남자애들이 관심을 표명하는 서투른 방법의 일 종이었다. 그리고 내가 눈치챌 정도면 산이는 그 감정에 대해 논문 하나 쓰고도 남았을 상태였겠지만, 녀석은 은수 가 자기를 따라다니도록 그냥 두었다. 윤토형과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친했는데 말이지. 어쨌든, 윤토형과 산이 사 이에 잠시 보이지 않는 긴장이 흐른 후, 윤토형은 무릎을 꿇은 양아치 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을 보고 놈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금새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냥 밟히기는 억울했던지, 한 놈이 단말마의 비 명처럼 외쳤다. [우리가 카라 소속이라는 것 알고나 이러는 거야?] [그게 뭐야? 먹는 거냐?] 윤토형은 잠시 망설였지만, 깨끗하게 비웃어 치웠다. 며칠 뒤 부터 두고두고 소일거리가 생긴 산이는 좋아라고 쌈 질을 실컷 했으며, 그래서 한 달 뒤에 은수가 죽었다 : . 그리고 나는 끝이란 것이 있다는 걸 배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앗; 요 놈 말이죠, 아직 완결 아니거든요. 작년 겨울 18편까지 쓰고 일년간 연중(;;) 이었답니다.. (먼산... 앞산 뒷산 주산 배산임수...) 2001년 2월 현재에야, 겨우 19편과 20편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 실은 엘리시움에 이런 저런 허접한 글들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게으름에서 일어서려면 무언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배수진을 치는 거죠!!!-_-;; "3월까지 끝낼께요!!"라고 많은 분들께 큰소리를 쳐 놓으면, 맞아죽고 싶지 않아서라두 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알 수 없죠. 혹시 스스로의 매저성을 발굴하는 좋은 기회가 될 지도.. (발랄^-^*)) 오늘 지하철이 공짜라고 아주 신이 나서 들락 날락 몇 번을 타 먹었습니다. 돈 벌었어! 라고 비싼 차비에 대한 서민의 분노를 해소하는 즐거운 눈축제...........지금 열이 나서 조금 제 정신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꼭 감기 조심하세요. ㅡ.ㅜ 제 지루한 끄적임들을 읽어 주신 분들과 격려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 드리며. "苦". 지나간 십대의 질풍노도疾風怒濤에 바침: 한 때는 전부였지만. "Bitter" 2. "Bitter"-2. 2000.01.23. by saroni 관점이 사람을 결정한다고 진영이가 말한 적이 있다. 산이를 떠난 후에, 나에게 있어서는 역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겠지. 풍경 하나를 봐도, 불교 경전을 읽어도 마찬 가지이다. '무아의 경지'란 말을 읽었을 때에도 그렇게 그 단어를 알았다. 내게 있어 그것은 그림 그릴 때를 일컫는다. 아무런 잡생각 없이, 연필을 쥐고, 수학적 계산이 아닌 순전히 내 자신의 감에 의해 그 위치 및 강도가 정해지는 불확실성의 선들을 내리긋고 있었다. 선과 선이 교차되면서 '느낌'이란 것에 의해 화지 위에 줄리앙의 얼굴이 떠오 르게 되는 것을 보며,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이 내 것이 아닌 듯한 황홀경에 잠시 사로잡혔다. 마치 남의 의 지에 의해 손이 절로 움직여 그 선들의 있을 자리가 결정되는 것 같았다.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때 만은 내가 내 자신의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가 있었다. 내 그림을 보며 말 그대로 자화자찬을 하면서 말이지. 그러나 실로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로, 사실은 그 인격 자체부터 자신이 겪었던 사건들, 만났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다. 환경이란 무엇이기에 사람을 자신의 내부에 머물도록 두어 주지 않는가? 무슨 소리냐 하면, 미술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려 나의 집중 상태를 깨어 버렸다는 뜻이다. 공중에 둥둥 떠서 날던 손이 아래로 탁 떨어 져 내리었다. 자동적으로 그 쪽을 쳐다보았는데 -- 가슴이 철렁!! 산이였다..... 외면하고자 했지만, 그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저 녀석이다. 여전히 빛이 그 주변에 모여드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녀석들 눈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테고, 연필 사 각이는 소리가 잦아든 미술실 안은 잠시 공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그는 다른 녀석들은 일절 쳐다보지 않고, 내 쪽으로도 눈길 주지 않고, 주목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 특유의 포즈로 문간에 비뚜름하니 기대 서서 진영이를 부를 뿐이다. [표! 나와 봐.] 진영이는 이젤을 밀어 놓고 아무 말 없이 나간다. 그 달각, 소리 외에는 미술실 안은 조용하다. 또 싸움이 있을 예 정인 모양이다. 카라파 녀석들이나 양명고 녀석들이나 똑같이 질기기 짝이 없어서, 몇 개월 째 서로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며 개처럼 물고 늘어지고 있다. 더구나 은수가 자살한 다음에 윤토형이 산이에게 덤볐다가 병원에 입원한 후로, 양쪽의 전력은 거의 대등해져 있다. 지금은 산이가 총 책임을 맡은 모양이다. 오로지 자극을 먹고 사는 녀석 답게, 산이의 뒷모습은 신이 나 있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 산이의 행복이 전염된 듯이, 문이 닫히자 미술실 안은 일거에 떠들썩해진다. [이야.. 또 뭔 일이 있나보다. 진영이형이 가는 걸 보니 짱급인가 본데.] [저번에 공원에서 붙어서 여섯 명이나 입원했대더라.] 신입생 하나가 묻는다. [그런데 저 사람 누구예요?] [윤 산 선배다.] [아, 저 형이? 진짜 이쁘쟎아...남자 맞아요?] [그렇지? 무슨 모델 같이 생기지 않았냐?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쌈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 [그런데 저 선배 따라 다니는 남자들도 많다던데..] 그 때 쾅! 소리가 나자 모두들 잠잠해진다. 이젤을 걷어찬 것은 정호다. [아 씨발... 시끄러! 싸움이고 나발이고, 니들이랑 뭔 상관이야!] 일학년, 이학년, 삼학년, 다들 이젤 뒤에 머리를 숙이고 숨어서 서로 찌푸린 눈길을 교환한다. 이어서 정호가 4B 연필을 스케치북에 눌러 부러뜨리는 소리가 우둑! 선명히 울려퍼진다. 성깔 하고는. [선배님들 입시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떠들고 지랄이야! 남자 새끼가 이쁘건 말건 무슨 관심이 그리 많아? 니들 호 모냐?] 빌어먹을..... 정호가 부러뜨린 연필이 내 가슴에 와서 쿡 박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얼른 스케치북으로 몸을 숙여 공연히 줄리앙의 멀쩡한 콧등에 지우개질을 하는 척 했다. 정호는 그 까다로운 성미에 뭐가 그렇게 거슬렸는지, 이젤을 한 번 더 걷어차서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벌떡 일어나 서 나가 버린다. [아 졸라 짜증나!!!] [야! 김정호!! 너 왜 그래?] 그 뒤를 서래가 쫒아 나간다. 서래 녀석, 성격 좋기도 하여라. 저 변덕스런 놈에게 일일이 장단 맞춰 주는 것은 서 래 뿐이다. 정호는 3학년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신경이 날카로운 것이지? 녀석들이 문을 연 틈을 흘깃 보니 이미 산이와 진영이는 그림자도 없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스켓치북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하지만, 어느 새 도화지 위에 상상의 드라마가 펼 쳐진다. --> 산이가 들어와 내 앞에 선다. 나는 본 체도 않겠지. 그러면 산이는 드디어 그 도도함을 살며시 풀고 한 마디 한다. 이젤 위로 스켓치북 위로 얼굴을 얹겠지. '현우, 네가 보고 싶었어.' 그러면 나는............. 젠장! 빌어먹을! 강현우!!! 무슨 계집애 같은 맹한 망상에 빠져 있는 거야 지금!!!!!?! 그런데 지금 싸움하러 간 것이 겠지.. 뭐라도 잘못 맞아서 만일 산이가 다치면 어쩌지..? --> 하얀 병원, 햇볕이 창으로 쏟아져 내리고, 나는 녀석의 곁에 앉아서 눈 감은 얼굴을 보면서.........스탑!! 안 돼!!!! 이 각도의 줄리앙은 열받을 정도로 산이와 닮은 턱을 하고 있다. 곁에서 걸으면서 올려다 보면 꼭 저런 모양의 균 형잡힌 뼈가 아주 고왔지. 그러면 나를 보고 싱긋 웃는 산, 침대에서 생글방글 미소짓는 산, 슬픈 표정을 하고 꼭 피해자 마냥 앉아 있던 녀석의 마지막 모습. 어쩌면 정말로 상처받은 것은 그일지도......아냐! 말아먹을!! 하지만 '아 파?'라고 그렇게 상냥하고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던 녀석인 산....... 그렇게 그를 뿌리치고 나온 이후로, 나의 날들은 그 빛을 잃었다. 놈을 알게 되기 전 한 때 금이었던 것이 이제는 색칠한 나무조각이 되고, 한 때 포도주였던 것은 식초가 되어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일상, 산이에 의해 단숨에 내 가 유리되어 버린 19세의 평범한 삶을, 나는 그 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러나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이미 알 고 있었다. ..이렇게 끔찍한 질식 상태가 되어버릴 것을. 그럴 줄 알면서도 돌아와야 했던 것은, 그래서 나는 산이를 증오한다. 내 소박한 안정의 정체를 들쑤셔 주고, 한계를 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 내가 사랑하던 것들을 물릴 대로 물린 맛으로 바꾸어 버린, 녀석의 힘을. 처음엔 그런 점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녀석이 그 긴 손가락으로 잡아 이끄는 대로, 금지된 일들을 저지르는 쾌락 을 하나 하나 배워 나갔지. 산이의 눈을 통해서 보면 세상은 온갖 종류의 아름다움과, 스릴 넘치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지. 언제까지나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어. 녀석의 노래, 맙소사, 그 노래들. 그리고 거짓말 같은 모험담들, 현학적이긴 하지만 참 고운 뉘앙스의 온갖 외국 이름들과 지명들. 함께 걷고 있으면 성큼성큼, 어느 새 저 만치 앞 서 갔지. 내 걸음에 맞추어 주거나 뒤돌아 보아 준 적이 결코 없지만, 뒤에서 보고 있으면 정말 귀여웠어. 사람들 이 잘 보지 않는 나무 꼭대기나 하늘, 빌딩 옥상, 그리고 다시 바닥에 눌어붙은 껌 조각 사이에서 머리가 천천히 이동하곤 했거든. 애 같았지. 무슨 어린애 마냥 호기심이 많으면서, 동시에 그렇게 무책임했지.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어. [그 놈은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단 말이야!] 윤토형의 이를 꽉 물고 반쯤 흐느끼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히 들려온다. 내 위에서. 나는 먼지 투성이인 체육관 창고 속에서 그에게 완전히 깔려 있었다. 첫 눈에 제 정신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더 랬지. 내 바지는 한 쪽 다리에 걸쳐져 있었고, 윤토형은 내 상의를 벗길 여유도 없이 곧바로 파고들었다. 제인장, 망할 윤 산, 내 얘길 어떻게 함부로 하고 다녔길래 말야. 지금에야 억지로 이런 저런 설명을 추스려 볼 수 있지만, 그 땐 정말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비참하고 또 순수할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나는 아마 울지 않았을 거야. 그랬던 걸로 기억해. 당하면서 계속 팔이 화끈하다 했더니, 바닥에 뭔가 뾰족한 것이 튀어나와 있어서 거듭 찔렸던 것이었 다: 피가 꽤 났었다. 그걸 보고 윤토형, 바보같은 윤토형은 방금 날 강간한 주제에, 어쩔 줄 모르고 내게 미안해 하는 거야. 사정을 하 고 나자 겨우 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어. [미안해, 현우야, 이런 썅, 네 탓이 아닌데. 망할..] [...윤토형...] 오히려 내가 그를 달래 줘야 할 지경이었다. 은수가 자살한 내역을 실컷 들었다. 산이가 은수와 체육관에서 뭘 했 는지, 산이가 카라파 넘버 투를 얼마나 솜씨 좋게 회쳐 놓았는지, 그리고 그 자식들이 은수를 끌고 가서 산이에게 혼자 나오라고 했던 것이 어떻게 완전히 씹혔는지. 은수가 며칠 동안 몇 놈을 겪었는지. [내가 매일 집에 찾아 갔었어, 은수가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기 때문에, 산이 새끼 죽여버릴 여유도 없이 은수 돌 보러 갔었는데, 그냥 그렇게 손목 끊고 가 버렸단 말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알던 사람이 죽.었.다.는 것, 그런 일이 내 바로 옆에 떨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결코 은수를 볼 수도 없으며, 앞으로도 은수에게 말을 걸어 볼 기회는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것. 윤토형이 그애에 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기회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 그러나 정말 피부에 와 닿질 않아서, 알기만 하면서 멍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다.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어서 일찍 자려 했는데, 잠이 통 오질 않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은수를 보았다.....가까이서 정면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옆모습 뒷모습 먼 모습. 항상 산이 옆에서 타오르는 맹목의 눈빛을 하고. 맹목盲目. 내가 산이에게서 내 자신을 떼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날 밤 그 단어를 떠올리게 된 순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눈이 멀었군'이라는 객관성을 유지하고 그 시점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돌려 산을 보았다. 뭘 해도 그렇게 아름 답게만 보이던 다면체의 수정 같은 윤 산을, 용기를 갖고 직시해 보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자 알게 되었다. 윤 산, 그 망할 인간은 은수에게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으면서, 적당히 자기 능력을 발휘해 그 애를 중력권 내에 사 로잡아 두었다. 아주 잠시 쳐다 보아 주는 것, 가끔 관심 보이는 척하는 것, 우아틱한 말 한 마디. 허영심 때문이었 을까? 특히 윤토형이 애타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즐기는 것이었을 테지. 그리고....나도 그걸 좋아했었다. 하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흐윽.'하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고통이 내 누운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즐겼지. 은수가 보는 눈 앞에서 산이를 낚아채어 갈 때의 화려한 기분을.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이불 속에 파고들어 소리를 죽여 울었다. 내 속에서 폭발하는 슬픔을 제대로 배출하기에는 몸이 따라오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가슴이 옥죄여 왔다. 그 존재가 죽어서 없어져 버린 거야. 나는 은수를 말린 적이 없었다. 그 착하고 평범한 애를 붙들고 산이의 그 대단한 껍질 속에 어떤 괴물이 들어앉아 있는지, 그 매력이 알고 보면 맹수가 아름답듯이 그렇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경고해 줄 정성조차 없었다. 맙소사.......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무관심을 베풀었었다. 이젠 그것을 만회할, 되돌려 놓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산이에게 먹히도록, 그렇게 놓아 두다니, 나는 다 알고 있었는데.... 나 역시 그 애를 죽게 만든 여럿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기억한다 은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체육대회 끝난 날 수돗가에서였다. 수도꼭지 아래에 머리를 넣고 시원한 물을 끼얹었다. 이건 산이한테 매운 거였지 하고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들었는데, 그 때 건너편 오른쪽에 은수가 있었다. ...알았다: 내가 머리를 드는 순간에 고개를 돌렸다는 것을. 그 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수돗가를 떠난 것은 나였다. 등을 돌리고, 걸어서. 침착하게, 등에 눈길을 느끼며. 은수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 그 때 내가 그에게 손을 뻗었더라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 운명이? 산이라면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내 죄책감을 달콤하게 녹여 주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품에서는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귀를 막고 눈 을 가리고 있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산이를 통해, 세상은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것이라고 내 자신을 속이고. 그러나, 은수는 죽었다. 이 '사실'이 내가 그 날 밤 산이에게 달려가지 못하도록 하는 칼날이었다. 산이가 뭐라고 다독여도 사실은 사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냐면 나는 은수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산이의 시어들로 포장되는 것을 원치 않 았기에, 밤새 내 안에 녹이고 낙인을 찍었다: 은수라는 이름을 가졌던 존재 하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보았다. 비참할 정도로 벗겨놓고서, 나를 잘 새겨 보았다. 그 결심을 했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창 밖으로 해는 신선하게 떠 있었고, 자동차 소리, 새 소리, 여 느 아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나는 여전히 잠을 잤 고 배가 고팠으며, 화장실에도 잘만 갔으며 산이가 내 머리를 한 번 툭 친 것 만으로 성욕을 느꼈다. 아이들은 은 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잠시 술렁였지만, 고 3 말기의 학교 생활은 다시 각질로 딱딱하게 덮여서 수능 카운트 다 운을 향해 모든 안테나를 집중시켰다. 시간이 가고 다들 은수를 잊고 나름의 생활 속으로 되돌아갔다. 도시락을 까먹고 매점에서 생존 경쟁을 하며 수업 시간에는 딴 짓을, 쉬는 시간에는 불현듯이 공부를. 그리고 운동장에서 볕을 쬐며 웃기도 한다. 하지만 몇 명은 그 럴 수 없었다. 그 속에 윤토형은 물론이고,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산이는 아니었다. 그제야 그 보기 드문 옥 같은 존재에게서 티가 조금씩 관찰되기 시작하더니, 내 눈 앞에 떴던 무지개가 희미해지 기 시작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런 것을 끝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 일부분은 혹은 대부분 은 남아 있다 언제까지나 언젞지나, 그렇게 윤 산을 기억한다. 그래서 가슴이 멍든 것 같이 아픈 이 현상은 만성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얼마나 다른지, 또한 몸이 원하는 바는..... 매일, 그리고 빌어먹을 종일, 산이의 존재를 내 세포 구석구석에 느낀다. 온 몸의 피부에 문신으로 그려져 있는 것 같이. 그러나 나는. ...................... 하하. 사실은 아파 죽겠다. 나는 지금 생살을 뜯어내고 있단 말이야! 나쁜 자식, 한 번만 쳐다봐 주면 어때서. "Bitter" 3. "Bitter"-3. 2000.01.30 by saroni 일상, 일곱 시에 집에서 일어나 학교에 가고, 보충수업이 끝나면 미술부에, 그 뒤엔 학원에 가서 열한시까지 그림 을 그리는; 고3의 생활. 정체된 불안. 그 정해진 코스의 중간에, 길에서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사고 나니 말보로 레드였다. 망할. 이 기회에 담배를 끊자 싶어서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끔찍하도록 짜릿하고 달콤하지만 / 독인 것을 알면서도 왜 이런 걸 피우겠냐고! 학원에 갔더니, 진영이와 정호는 벌써 와 앉아서 각자 자신의 스케치북에 열중하고 있었다. 서래는 왜 미술학원에 다니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녀석들의 그림 풍은 각자 달라서 재미있는데, 진영이의 터 치는 굉장히 강하고 산뜻하다. 내 취향에는 너무 어두운 편이지만, 목탄화 같은 느낌이 독특하고 맛이 있다. 정호 는 한 마디로 제멋대로이고(선생 말을 절대 듣지 않으며, 고쳐 주거나 하면 다 박박 지워버린다. 그러다 수틀리면 찢어 없앤다.), 몹시 요염하게 그림을 그린다.. 뭐랄까, 석고상의 표정이나 입술 끝마리 같은 것이 그런 느낌을 준 다. 정호가 정말 신이 났을 때의 그림은 입시 미술과 거리가 있어서, 조그마한 삼각형으로 명암을 다 채운 적도 있 었고 구불구불한 파상선으로 그리기도 했는데, 보고 있으면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았다. 서래는 낮에 미술 부에서 그리는 걸 보면 꽤 스탠다드하고 딱 데생 책에 나오는 것 같은 스타일로, 조금 개성은 없지만 가장 선생들 의 칭찬을 들으며, 나보다는 훨씬 잘 그린다. 내 그림은 내 눈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진영이 그림과 비교해 보 면 너무 약하고 밝다는 생각을 한다. 고치려고 노력중이지만, 도저히 진영이처럼 '북, 북'소리가 나고 이젤이 다 흔 들리도록 그어댈 용기가 없다. 상상 속에서는 잘만 되는데, 손으로는 제대로 따라 주질 않는 것이다. 구석에 가서 연필을 깎는데, 누가 뒤에서 툭 쳤다. 돌아보니 표진영이다. [담배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 요새 왜 그렇게 우울하냐?] 난 그냥 웃었다. 진영이는 지금 2학년이지만 나이는 나와 같다. 공고에서 양명으로 전학 오기 전에 1년 꿇었거든. 소년원에 있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가끔 궁금해 하는 것은, 다른 3학년들에게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선배 호칭을 붙이면서, 나에겐 왜 말을 놓고 현우라고 부르는가에 대해서였다. 어느 날 미술부에 들 어와 있었고, 조금 있더니 정호를 동반한 채 내가 다니던 이 학원에 왔다. 그리고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는 체 하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진영이는 누구 나와 다 사이가 좋으니까, 위로는 윤토형과 산이로부터 아래로는 서래와 정호까지. 인문계 학교는 절대로 공고를 이길 수 없는데, 학교 전체가 날라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문계가 정규군 3000명에 농민군 17000명이고 그 쪽은 인민군 20000이랄까.... 게다가 녀석들은 1 시에 끝나니까 휴식도 충 분하다. 그 중에서도 동양공고는 우리 구 최강이었는데, 거기 짱이 전학왔다니까 전교의 아이들이 다 쫄아버린 것 은 당연했다. 알려진 바로 별명은 '미친개'. 미친개란 보통 피 볼 때까지 설치는 스타일을 칭하며, 상대가 누구든 일단 싸우고 본다. 말이 안 통하는 것이 특징인데, 진영이에게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알고 보니 꽤 괜찮은 녀석이었거든. 어쨌든 그 때 산이가 얘기해 준 바에 따르면, 표진영은 옥상에서 3학년 일곱에 둘러싸여 담판을 지었다고 한다. '저한테 관심 끊으세요, 공부할 껍니다. 필요할 때는 부르셔도 좋지만, 별 일 아닌 걸로 귀 찮게 하시면 혼나요?'란 게 결론이었다고 그러더군. 아마 산이가 진영이를 이상하게 맘에 들어했기 때문에 녀석이 별 분규 없이 양명 세력 내에 편입된 것 같았다. 그러나 애들은 다들 진영이를 두려워하며 슬슬 피했다. 미술부의 이젤 배치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었어. 녀석 주위로는 5미터 반경의 원이 형성되어 있었지. 하지만 진영이는 별 신 경쓰지 않는 듯이 그림 그리고, 애들에게 지우개 빌리고 긴장해 있는 녀석들에게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 그랬지. 워 낙 사교성 좋은 서래 정도나 겨우 농담 붙이고 그랬어. 그러다 학기 초 어느 날, 정호와 서래가 럭비부 애한테 엉망으로 맞고 눈가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온 적이 있다. 우리 평민들은 럭비부와 상관이 없다: 걔들은 다들 밥 먹고 운동만 하며, 수업시간에는 항상 자니까. 그러나 애들 은 괜히 두려워하는데, 그 덩치들이 장난이 아니거든. 한 마디로 인간이 아냐. 어깨는 인간 종족의 1.5배에다가 피 부는 흑인처럼 그을려 있지. 그 녀석들은 타 종족에게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정호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 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지. (나중에 서래 말을 들어보니 결국 그랬더군.) 어쨌든 미술부 애들은 찍소리도 할 수 없었어. 본디 미술부와 문예부 애들은, 누구나 아주 우습게 보지. 체력에서 벌써 차이가 나는 걸 뭐. 그런데 진영이가 벌컥 화를 내는 거야. 호통을 쳤지. [씨발, 안내해.] 서래는 깜짝 놀랐지. [형! 얘가 잘못한 거예요, 어쩌려고..] [그것들이 미술부를 아주 좆밥으로 보는가 본데, 내비둘 생각이냐?] 그래서 진영이는 체육관으로 들어가고, 애들은 몽땅 쪼르르 쫒아갔지. 나는 쇠냄새 풀풀 나는 것 싫어서 그냥 미술 실에 있었어. 뭐, 나중에 흥분한 서래에게 들었더니 완전히 소년 만화이더군. 퍽! 콰당! 우지끈! 챙강!! 물론 진영이 가 완승했지. 싸움이란 건 덩치나 체력과는 또 다른 것이거든. 원래 깡 좋고 기 센 놈이 이기는 거야. 겉모양이 산 이처럼 곱상하든 진영이처럼 귀여운 얼굴이든, 내용이 겁대가리 없는 쪽이 끝에는 승! 이지. 외려 작은 고추가 맵 다는 말이 잘 들어맞는 것이 싸움이야. 그리고, 결과는? 운동부랑 붙어 이기면 완전히 평민들의 영웅이 되는 것이지. 그 후로 미술부에 감히 찝적대는 놈 들은 없었고, 진영이는 급속도로 스타덤에 올라, 웬만한 애들과는 다 친해졌어. 알고 보니 굉장히 성격이 좋더라구. '현우야 너 우울해 보인다.' 라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나에게 신경써 줄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 뭐랄까...형 같아. 어쨌거나, 아까 산이를 본 후로 나는 여전히 그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지. 학교에서 나오면 조금 나아질까 했는 데, 어제 그리던 그림을 보니 산이가 내게 했던 말이 계속 생각이 났다. '네 그림은 참 섬세하고 잔잔해.' 즉, 소녀 취향의 이쁜 그림이란 뜻이다. 그 놈의 습관적인 아부를 파악하게 된 이후로, (알고 보면 말과 행동이 일 치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놈이다.)나는 매사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버렸다. 아무리 의도적으로 진하게 그어도, 마냥 부드럽고 정밀묘사 마냥 강도가 부족한 그림일 뿐이었다. 계속 어두운 부분 위에 긋고 또 긋 고 하니 터치가 오히려 뭉개지고 검은 부분이 전등을 반사하여 번들거리는 망친 그림이 되고 말았다. 하아, 둘러보 아도 나보다 엉망으로 그리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입시가 코앞인데 돌아버리겠군.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일어서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정 선생님이 [현우야, 벌써 가냐?] 라고 했지만, 힘없는 웃음을 한 번 지어 보이고 문을 밀었다. 그런데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니, 진영이가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내가 멀뚱하게 쳐다보자 [나도 갈 곳이 있어서.] 라고 말한다. 싸우러 갈 시간이 된 모양이지.... 순간 또 산이 생각이 나서 기분이 나빠졌다. 이 녀석도 똑같은 놈이다. 무엇 때문 에 너희는 그렇게 피 흘리고 사람 죽여가며 싸우는 것이지? 강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런데 길에 나간 다음에도, 이놈이 여전히 옆에 바싹 붙어서 따라온다. 예의상 한 마디 해 줬다. [어디 가?] [음, 그냥.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너 데려다줄까 싶어서.] 뭐하러? 라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우울해 보여서 걱정해 주는 거야? 필요없어! 라고 말하는 나를....으음, 상상할 뿐이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진영이를 똑바로 쏘아보며, '귀찮으니까 저리 가 줄 래?' 라고 한다면? ....그럴 배짱은 없다. 그냥 둘이 말없이 걸었다. 터벅터벅. [...............] [...............] 진영이의 옆모습은 산이와 닮은 데라고는 없었지만, 오후 아홉 시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옆에 있는 것이 산이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똑같이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똑바로 앞을 보는 눈매, 확실히 이 녀석도, 어딘지 피 냄 새가 풍겨오는 그런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매우 어색한 침묵.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인가? 나는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고, 결국 진영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집이 어디야?] [.....현대아파트.] [음.] 그리고 다시 썰렁. 둘 사이로 자동차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떠들고 웃는 소리. 진영이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 었다.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 무슨 생각으로 날 따라온 거야? 친구라도 되고 싶은가?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애였다면 산이에게 허덕이며 휩쓸려 다닐 이유가 없었겠지. 그냥 마음 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난 지금 피곤하니까, 나, 이렇게 재미 없는 녀석이니까, 제발 저 앞의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달라구!! 그런데 사거리에서 어둑한 골목으로 접어든 다음에, 진영이가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반갑지 못한 일행이 더 따라 붙었다: 척 보기에도 껄렁해 보이는 날라리 셋이었다. 물론 나는 녀석들의 실루엣을 보았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눈을 내리깔았지만, 표진영이 그럴 이유가 없겠지. 남자애 들은 눈만 마주쳤다는 이유로도 곧잘 싸우는데, 꼭 무슨 동물들 같다. 아니나 다를까, 슥 지나가면서 진영이를 보 더니, 곧바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야, 새꺄, 뭘 후라려!] 진영이를 보니 피식 웃는다. [야, 이 자식이 비웃어? 내가 우습게 보이냐??] [....너, 나 모르냐?] [뭐야, 너 뭔데 개새끼야.] [양명의 표진영이다.] 진영이는 첫눈에 그렇게 대단스러워 보이는 타입은 아니다. 눈을 야리기 시작하면 인상이 장난이 아니지만, 평소에 는 나름대로 귀엽게 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고, (스물 세 살이 된 지금도 태사자의 이동윤을 꼭 닮 은 동안이다.) 키도 175밖에 안 되거든. 암튼 산이에 비교하면 굉장히 평범한 녀석이었다. 게다가 이 동네는 동양공 고와는 별 인연이 없고, 진영이는 양명에 온 이후로는 비교적 얌전했으므로 인상착의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해 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깡패녀석은 아주 우습다는 듯이 [구라치지마 새끼야, 니가 표진영이면 그 옆의 비리비리한 놈은 윤 산이겠다.] 그리고 자기 말이 아주 우습다는 듯이 킬킬 웃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에 저놈 세상 하직하는 것 보겠군 싶어서 옆 으로 물러날 준비를 히고 있었는데, 진영이는 두들겨 패는 대신,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꺼낸 것은 학생증이었다...... 멍해져서(또한 허망해져서) 보고 있는데, 진영이는 순진한 눈빛을 하고는 억울하다는 투로 [확인해 봐.] 라며 그것을 건네주었다. 녀석들은 굉장히 황당한 표정을 하고 가로등 빛에 비추어 보더니, 순식간에 당황한 표정 에서 다시 사색으로 바뀌어 갔다. 난리가 났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는 모르고...] [됐어, 됐어, 꺼져. 현우야, 가자.] 학생증을 돌려받은 진영이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놈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는, 꼬리가 빠져라 도 망질을 쳤다. 헤에..... 난 몹시 놀라서 진영이를 응시했다. 만일 산이였다면 주머니에서 나온 건 칼이었을 게고, 쟤 들은 벌써 얼굴에 바둑판 줄이 생겨 인생 조진 지 오래일 것이다. 내가 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까 진영 이는 민망한 모양이었다. 딴 델 보면서 담배꽁초를 탁 던져 버리고, (아까 피던 길담배가 다 타지도 않은 짧은 시 간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머니에 양 손을 넣더니 빙그레 웃는다. [야, 강현우, 그런 표정 하니까 너 눈 진짜 크다.] [.....놀랐어.] [응?] [...에, ...싸울 줄 알았어.] [아아, 쓸데 없는 싸움은 피하고 싶어서.] 하? 나는 일명 싸움 잘 하는 애들은 일단 무조건 때리고 보는 줄로만 알았었다. 약간 다르군? 하지만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고, 우리 단지에 접어들 때까지 진영이는 계속 곁에 있었다. 상가 앞을 지나갈 때에 야 녀석이 한 마디 했다. [잠깐만.] 뛰어가더니, 손에 들고 온 것은 새우깡 한 봉지였다. @@ [너 저녁 안 먹었지? ...돈이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딱 삼백원 있었다.] (그 땐 새우깡이 삼백원이었죠...백원이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는데... ㅠ.ㅠ) 어어라? 신기한 녀석이로군. 나는 당혹스런 기분으로 과자 봉지를 받아들었다. 저녁 안 먹었지란 말은 왜 하는 거 야? 전 재산을 털어 신경써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발언이로군. 하아... 왜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일까.. 여하간 [....고마워.] [푹 쉬어.] [...응.] 진영이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이런, 늦었네.] 이것도 나에게 부담을 주기 적당한.......... 이런, 나 왜 이렇게 비뚤어져 버린 것이지? 산이의 매끄러운 말들을 해석 하면서 살다 보니, 남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버렸군. 어쨌든 진영이는 급히 어디론가, 아마도 결 투 현장으로 향했다. 나는 우리 동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밤을 가르고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현우야!] 고개를 들고 보니 멀리서 진영이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한 손은 주머니 속에 있다. 어둠을 두려워하 지 않는 발랄한 도둑 고양이처럼, 가뿐하게 걸으면서 나를 보며 웃는다. [짜샤! 힘 내!!!] 풋.... 우울한 기분은 여전했지만, 그리고 내 의심들도 여전했지만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마음 씀씀이가 고운 녀석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은 순간이며, 곧바로 산이를 그리 워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뭐, 예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나중에 진영이가 말하기로는 '너 그 당시엔 정말 말 붙이기 힘든 녀석이었어. 몸을 사리고 경계의 눈빛을 한 채, 등을 돌리고 그림만 그리고 있 었쟎아. 하하, 그 때 내가 따라갔더니 얼마나 퉁명스럽게 쳐다보는지 말야.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어.' 랬다. ...당시, 그렇게, 나는 친구도 없이 그냥 내 세계에만 파묻혀 있었다. 오직 상상만 하고 있었지 - 진영이가 나에게 손짓하기 전 까지는 말야. 그리고 정작 일이 이렇게 흘러올 줄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내 옆에 누운 진영이에게 웃으 면서 '너 아주 별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라고 말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우리 둘 사이에 시작이 있었다면 그 날 밤이었겠지. 정녕 끝이란 것은 또 다른 시작이다. 그렇게 진영이를 기억한다. "Bitter" 4. "Bitter"-4. 2000.02.03. by saroni 아직도 나는 그 때의 꿈을 꾼다. 아마 많이들 그런 꿈을 꿀 게야. 시험지가 앞에 놓였는데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다든지 하는 흉악한 꿈. 국민학교 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기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험들을 치렀는지 셀 수도 없겠지. 우리의 품질을 평가하는 시험이라는 괴물은, 꿈 속에까지 우릴 쫒아다닌다. 아마 죽는 날까지. 또한 그 때마다 '이번이 벼락공부는 끝이야!'라고 다짐했었지. 하지만 긴장이 풀리고 나면 '내일부터..'라든지, '조 금만 더 놀고. 쉬고..' 라는 마음이 올라와. 그런 나를 알아채고 산이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든지 '카르페 디엠'이나 '노세 노세 젊어 노세.'같은 달콤한 말들로 꼬여 내어 놀러 가곤 했지. 당장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아주 잘 알았는데,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적이 올라갈는지도 알고 있 었지만, 왜 그렇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집중이 되지 않아 수학 문제 하나를 잡고 두 시간이나 헤매 다가, 몹시 우울해져서 산이에게 전화를 하곤 했지. 그러면 그 녀석은 그걸 2분만에 풀어 가르쳐 주고, 세상은 다 시 내가 덤벼볼 만한 것이 되었지. 그러면 '쉬어가면서 하라구.'라며 날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우고 어둡고 휘황한 거리로 데려갔다. 그 단단한 등에 머리를 대고 있으면 일시적으로 나는 앞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지. 산이와 있으면, 지구 궤도 쯤은 쉽게 벗어나, 지평선 너머로 그대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어. 하지만 집에 와서 그 망할 정석을 펼치면 아까 그 문제는 다시 이해 불능의 제 4외국어로 돌아와 있는 거야. 정석 지은 사람, 홍..누구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홍아무개는 종합영어 지은 넘이던가? 암튼 욕을 기하급수적으로 먹어 서 무지 오래 살 거야? 더욱이, 수업 시간 외에는 교과서를 모두 학교 사물함에 박아두고 있는 윤 산 같은 녀석이 전교 1 등 하는 현실, 운명의 여신은 엄청나게 편애를 한다는 산 증거를 바로 옆에서 보면서, 누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어? 그놈은 헤어진 다음에도 내 공부를 꾸준히 방해했어. 교과서든 노트든, 빈 페이지와 연필만 있으면, 곧바로 손이 움직여 산이 얼굴이 그 위에 그려지곤 했거든. 그러다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으러 나갈 때의 그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 종이를 접었다가 조심스레 펼 칠 때의 기분은, 마치 수술대 위에 누워 주사 바늘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과 같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숫자를 한 번 들여다보고, 눈을 꼭 감았다. 10점이나 내려간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담임의 [성적 떨어진 놈들은 면담이다, 알겠지? 심선우, 최시종, 정재원, 한익수, 최순학, 너희는 오늘, 고봉재, 박경민, 김동규, 김태현, 강현우, 내일.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 이 밥 버러지 같은 것들아!! ] 라는 말이 더욱 칼을 박아 비틀어 주었다. 50명 중의 열 명인데 그 안에 포함되고 말았군. 이름이 애들 앞에서 호 명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머리 위쪽에 무거운 것이 얹히는 것 같은, 짓누르는 치욕이었다. 등 뒤로 따가 운 시선이 느껴진다: 다들 나를 보며 비웃고 있겠지. 이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시킬 필요가 있어? 라고 벌떡 일어서 서 담임을 향해 외치고 싶지만, 그냥 앉아서 고통을 곱씹고 있는 것이 나, 보통스러운 학생의 도리이다. 수능이 석 달 남았을 뿐이니 정신 차리라는 채찍질들과, 공부해서 남 주냐는 당근들이 말의 형태를 띠고 교실 안 에 퍼져 나갔다. 그래, 내 탓이지.....색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할 일 안 하던 내 탓이지. 이 정도로 기분이 파작 가라앉은 날에는 음악을 듣는 것 밖에 치유할 방법이 없다. 학교 구석의 언덕 뒤에 있는 움푹한 장소, 나만이 알고 있는 은신처로 도망쳐 들어간 나는, 도어즈Doors의 테입을 넣고 이어폰을 꽂았다. 위쪽 에 수풀이 무성하게 나 있어, 얼핏 보면 아무도 이런 장소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노을지는 저녁, 안락한 구 석, 짐 모리슨의 몽환적인 목소리, 사막의 모래 아래로 흐르는 강 줄기 같은 노래. This is the end, my only friend. This is the end, my beautiful friend. The end of everything exist... 언젠가는 미국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 대학에만 붙으면 뭐든 할 수 있게 되겠지. 자유가, 시간이, 허락이 무제한으 로 주어지고. 아르바이트를 할 거야. 돈을 모아서 캘리포니아에 가 보고 싶어. Guns&Roses의 노래에 나오는 그 깊 은 허무의 근원을, LA에 가면 알 수 있을까? 파리에도 가고 싶다. 짐 모리슨의 묘에 꽃 한 송이를 놓고, 그 역시 사람이며, 나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해 보고 싶어. 정말로 우리 나라 바깥에 세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 까? 비행기 한 번만 타면 다른 세상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진짜일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우체국에 가서 편 지를 부치면 그것이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다는 것 조차 사실 같지 않아. 결국은 산이 생각이다. 산이가 다른 나라 이야기들을 해 주었지. 그 녀석과 있으면 세상은 넓고 다채로웠으며, 내 살아갈 날들은 길었고 가능성은 무한했지. ...지금은, 모르겠다. This is the end, my beautiful friend. 만일 대학에 떨어진다면 대체 뭘 하고 먹고 살아야 할까? 부모님은 재수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지. 그러면, 직장을 얻어 돈을 벌어야 할 텐데, 내가 그림 그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있어야지. 몸도 약하고, 공부도 그저 그렇고 말재주도 없고. 아아 - 막막해.... 오늘 새벽에 마주친 청소부 아저씨가 어쩐지 남 같지 않았다. 저런 직장 조차도 얻을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러자 또 암울한 상상이 주욱 펼쳐지는 것이었다.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쓸고 있다가, 혹은 길에서 고구마라도 구워 팔다가 산이랑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그냥 죽어 버릴거야...ㅠ.ㅠ ....등등, 참 비관적 인 상상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만 나오지만, 그 때 나는 진짜 심각했다. 하루 하루가 괴로웠지. 그렇다고 공부를 했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며 딴 생각을 하거나, 딴 애들 처럼 수업 시간에 무협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지. 그냥 결과가 어떻게 되든, 빨리 수능시험이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다. 타임 머신이라도 있어서 수능 시험 뒤로 그냥 내 의식이 가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었지. 내 몸은 그냥 공부하고 시험 보게 놓아 두고. 그 정도로 도망치고 싶었다............그럴 수 있는 용기도 없는 상태, 얼마나 무력하고 답답했었던가. 진영이는 간혹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고등학교 시절이 제일 좋았다고,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글쎄, 넌 그랬 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순간의 쓰라림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있어. 추억거리로는 좋지만,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아. 지금은 따스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그 때는 타오르는 작열감이었고, 지금 서늘하다 정도로 느끼는 것은 그 때엔 얼 어붙는 추위였어. 온 세상이 그렇게 너무 강렬하게 느껴졌었지. 어른들은 그걸 다 잊어버리고 '별 일도 아닌데 왜 그래?'라고 하지만, 난 다 기억해. 섬세한 십대의 감수성 내지 순수성을 찬미하시지 마시길, 정작 그걸 가진 사람은 진짜 사는 게 지랄맞다고 느끼게 된다. 고호나 뭉크 그림 속에 살고 있는 셈이거든!! 진영이가 바로 내 옆에 올 때 까지 눈치를 전혀 채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나는 혼자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지. 그 때 누가 옆에 살며시 앉더군. 깜짝 놀라서 올려다 보니 진영이였어. 무슨 권리라도 갖고 있는 듯이 내 영역을 함부 로 침해해 들어오는 거야.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소리 없게, 흐르는 듯한 동작이었지. 매끈하게 내 조용한 우울 속으로 타넘어 오더니, 내 귀에서 이어폰 한 쪽을 빼어 들고, 자기 귀에다 꽂았지. 나는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어. 제발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었거든.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기분이 암울한 걸 어떻게 해. [도어즈 좋아해?] [.....응.] [나도 이런 쪽 좋아하는데.] 하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했지만, 나는 일부러 다른 곳을 보았지. '내가 방해한 거야?' 정도는 물어 보라구. 네 가 나랑 음악 취향이 비슷한 건 알아. 미술부에서 핫뮤직(Rock 계열 음악잡지)을 끼고 다니는 걸 몇 번 봤거든. 그 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이 녀석, 나와 친해지고 싶은 건가? 즉, 이것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대화거리를 만들고 어쩌구 하는.. 책에서 읽은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마냥 귀찮을 뿐이었다. '새우깡 한 봉지 사 줬다고 너와 놀아 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라는 멋진 대사가 생각이 났지만, ...그래도, 사람이 호의를 갖고 접근해 오는 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 '나는 네가 필요없다'라는 뜻을 어떻게 표명하면 좋을까? 나는 늘 사용하던 소극적인 방어책, 즉 조용히 씹는 것을 택했지. 그러면 대개의 녀석들은 혼자 더듬더듬 몇 마디 하다가 머쓱해서 사라져 가는데, 이 녀석은 조금 틀렸어. [오늘 미술학원 안 올거야?] 끄덕끄덕. 아아, 내가 안 오니까 걱정해서 찾아 나섰다는 건가? 학교까지 찾아온 거야? 그런데.... 내가 이곳에 있을 줄 어떻게 알았지? [잘 됐다. 오늘 서래랑 정호하고 미술학원 땡치고 Rock Block 찾아가 보기로 했거든. 신촌에 있는 뮤직 비디오 감 상실인데, 이번 달 핫뮤직에 나왔더라. 같이 가지 않을래?] 난 겨우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지. 난 지금 꼼짝하기도 싫어, 임마. 도망쳐 숨을 장소가 기껏해야 학교 구석 인 이 불쌍한 중생을 내버려 두라구. 이런 곳에 처박혀 음침하게 음악을 듣다가 들켰다는 사실이, 나를 매우 쪽팔 리게 만들었다. 방금 전 까지는 마치 어머니 품처럼 안락한 나만의 성소였는데, 이제 이 녀석이 이곳에 발을 들이 민 것으로, 난 이곳을 잃었구나. 이제 다른 모든 공간들처럼 이곳도 일상의 일부, 숨어 있기 부끄러운 그런 곳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고집 세게 고개를 저었다. 가버려! 다른 사람들처럼..! 하지만 녀석은 계속 웃고 서 있었지. [같이 가자.] [싫어.] [가자.] [싫다니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흠칫해서 녀석의 표정을 살펴보았는데, 그냥 미소띤 표정이어서 안 심했다. 그 순간, 진영이가 내 손목을 꽉 잡더니, 그냥 질질 끌고 나가는 거야!!!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나는 화가 나서 버둥거렸지만, 진짜 무식하게 힘이 세더라구. 째려봤더니, 그 방긋한 얼 굴에 표정 변화 하나도 없이, 내 머리를 한 번 쥐어박더군., [왜 그래? 안 잡아먹어. --- 야!! 전서래! 공주님 찾았다!!!] 땅거미가 깔린 운동장 저쪽 구석에서 실루엣 둘이 이 쪽으로 향하더군. [현우형~~!! 같이 가는 거예요?!] 제인장, 후배들 앞에서 억지로 붙들려가는 수모를 당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얌전히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가 줬 지만, 내내 한 마디도 안했지. 멱살이 잡혀 끌려가는 것이나 진배없었어. 파쇼 같은 놈! 세상에, 윤모군 이후로 이 렇게 제멋대로인 놈은 처음이었다니까: 산이 생각이 나니까 또 기분이 축 처지더군. 그리고 이 망할 성적표를 어떻게 어머니한테 보여 드린담? 그 때 눈 앞에 손가락이 번쩍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지. 서래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 눈 앞에 손을 젓고 있더라구. [현우형? 컴온, 컴온, 요새 기분이 안좋으신 것 같아요?] ->서래. [너는 닥쳐라, 원숭이. 고 3의 착잡한 맘을 어린 네가 어떻게 알겠냐.] ->진영. [뭐, 성적이라도 떨어지셨나 봐요? 그렇다고 그렇게 무게 잡고 계시다니 이상하고, 실연이라도 당하셨는가요?] -> 정호. 망할.. ㅠ.ㅠ 정말 날카로운 녀석이다. 그래,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어디든 가고 싶어졌다. 잠시라도 그 무거운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그리 고 잠깐 외도하고 올 생각을 하니까 이상하게 설레이기 시작하더라구. 게다가 녀석들이 놀라울 정도로 나에게 신 경을 써주는 말들을 듣게 되고, 서래가 그 귀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 주니까 조금 기분이 나아졌어. (서래는 백칠십임다.)응, 작은 무리에 속해 있는 그 느낌.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버스를 탈 때 쯤 엔 내 컨디션이 좋아져 있었지. 그러나 세 시간 후엔 일행 전부에게 암울한 오라가 덮여 있었어. [신촌에 있는 것 맞아?] 그 복잡한 골목들,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는 다 똑같아 보이는 길들을 헤집으며, 우린 계속 헤매어 다니고 있었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활짝 웃고들 있는 대학생들과, 그들을 위한 휘황한 불빛 사이로. 정호는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면서 아까 발견한 우드스탁에나 가자고 외쳤지만, 진영이는 침착하게 웃으면서 [조금만 더 찾아 보자.] 라는 것이었어. 굉장히 끈질긴 놈이더군. 황금 같은 우리의 자유 시간이 길바닥에서 줄줄 흘러, 여덟 시가 가까웠 지. 다리도 아플 뿐더러, 무엇보다 초조했어. 나 고 3인데, 인간도 아닌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제라도 학 원에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가? 그 때 겨우 서래가 외쳤어. [앗, 저거, 저 까만 간판!!] 그 간판은 불빛도 들지 않는 엄청난 구석에 박혀 있었지.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오버액션을 하며 난리를 쳤지. 3시 간의 노력 끝에, 커다란 고래라도 잡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구. 나도 공연히 신이 나서 애들을 따라 컴컴한 계단을 내려갔지. 벽에 스프레이로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양이 캐리커쳐가 그려져있고, 'crazy cat'이라고 쓰여 있었다. crazy, 狂이란 말이 그렇게 십대의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이유는, 그것이 자유의 상징 같은 단어임을 감지하 고 있었던 때문일까? 그것은 곧 '이반'이란 말과도 통하지. 사람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정해 버린 어떤 것. 아무 튼 벽에 붙은 메탈 그룹 포스터들 하며, 문을 열었을 때의 뿌옇고 컴커무레한 분위기 하며, 정말 날아갈 것 같았 어. 금광을 찾은 것 같이 흥분해 있었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컬럼부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런데 그렇게 뛸 듯이 기뻐했던 겨우 5분 뒤에, 열이 머리 끝까지 받친 정호를 서래와 진영이가 붙들고 신촌의 골목 사이로 끌고 가고 있었지. [샤발할!! 놔!!] [야, 정호야. 진정해라, 응?] [이우, 젠장!! 빡돌쟎아! 음악 듣고 싶다는데 고삐리가 뭐 어쨌다는 거야!! 대딩이랑 고딩이랑 뭐가 그렇게 천지차 이가 나?!] [야, 야. 시끄러. 저 사람들도 장사는 해야 할 것 아냐.] [아 씨팔, 나가서 교복 갈아입고 오래쟎아! 껍질만 바꾸고 오면 괜찮다니, 너무 위선적이지 않냐구!!] [그렇다고 사람을 패냐? 좀 생각을 하고 살아,응?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라구!] [시끄러!! 졸라 엿같네!! 이래서 딴데 가자니까 고집은 빡세게 세워서..]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둘 다 진정해~~!!] 프아.. 서래가 어쩔 줄 모르고 말리는 가운데, 정호와 진영이가 대치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아아, 수컷들이란... 불 행히 나도 숫놈이 맞긴 하지만, 정말이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물들이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서로 째려보는 놈 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담배를 불쑥 내밀었다. [우선 한 대 피자.] 둘은 약간 벙찐 얼굴로 날 쳐다본다. 그러자 서래가 시기적절하게 나선다. 나를 가리키면서 한 쪽 입을 가리고 엄 청 충격받은 표정을 지으며, [헉!! 현우형이 말도 하네?!] ..자, 잘했어. ㅡㅡ;; 두 놈 다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자 다음 단계, 남아도는 기운을 날려보내려면 역시 담 배가 제일이다. 우선 넷이 골목에 기대어 한 대 씩 피우고, [...저기, 홍대 앞에 내가 아는 데 있어. 거기는 교복 괜찮아.] Back Stage 가면 산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뭐... 상관없다. 그래도 공연히 긴장해서 들어갔는데, 음...잊었었다. 하도 어두워서 설령 아는 사람이 있더래도 알아볼 수 없는 곳 이라는 것을. 정말 좋은 곳이다. 이곳은. 바깥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주 공간에 이 방 하나만 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해 주 는 그런 곳이지. 녀석들은 아까의 실망과 분노는 모두 잊었는지, 신이 나서 벽에 붙은 포스터를 둘러보고 낙서들을 구경하고, 이것저것 곡도 신청했다. 그래서 온 몸을 흔들어 대는 굉음 속에 숨어 맘껏 소리도 질러보고, 어둠에 의지하여 헤드뱅잉도 한 번 원없이 해 보고. 서래가 잘못해서 테이블에 머리를 부딛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호 녀석이 정확히 그 혹이 난 자리를 다시 쥐어박는 모습도, 진영이가 조심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곡을 적어 달라고 해서 신청하러 갈 때도. (한 사람 당 3곡까지 신청 제한이 있었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 녀석들이 불현 듯 매우 귀 여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야. 내 양 옆에서 정호와 진영이가 번갈아 가면서 귀에 바싹 대고 [저 그룹 이름이 뭐야?!}}}} 소리를 지르고, 나도 그 애들에게 바싹 붙어서 [너바나Nirvana야~~!! 장르는 얼터너티브라고 하는데..}}} 라고 할 때의 그 으쓱한 기분 덕일까? 아니면 대화할 때의 그 필수적인 스킨쉽 때문에? 어둠 속의 몽환적인 담배 불 때문? 허락받지 않은 일을 함께 하고 있다는 동질감? 어쨌든, 우리는 맥주를 한 캔씩 마시고 담배를 넷이 두 갑을 피워치웠다. 귀가 멍하도록 메탈을 듣고 세 시간 동안 내내 헤드뱅잉. 그 상태로 폭주하는 좌석버스를 타고 동네에 돌아오자, 분명히 까만색이어야 할 하늘이 아주 선명 한 노랑색이었다. [우욱...!!] 정호와 나는 떡볷이집 뒤편에서 사이좋게 오바이트를 했고, 정호 등은 서래가, 내 등은 진영이가 두드려 주었다. 기실 두드렸다고 하긴 모자란 것이, 그 녀석은 아까 나를 억지로 끌고 갈 때의 우왁스런 행태와는 달리, 내가 무슨 유리로 된 물건인 마냥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리더군.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히 뒤에서 헤벌레 웃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 있다가 물어봐야겠다. 뭐, 그 때 나는 진영이 표정을 보지 못했어. 상상만 할 뿐이야. 그냥, 참 좋은 날이었어. 그 날부터 나는 '녀석들' 대신 '우리들'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산이에 얽힌 것들을 빼면 내 고등학교 시절 에 남는 추억들은 '우리'로 시작되는 것 밖에 없게 되었다. 기억한다: 내 속에 그 '우리들'이란 단어가 녹아들어 있다고. 죽을 때 까지 내 일부로 남아 있으리라고. "Bitter" 5. "Bitter"-5. 2000.02.03. by saroni 넷 사이에 뚜렷한 역학관계가 생성되는 데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이 되는 놈은 대개 정호다. 놈의 말투는 다 들으라는 듯한, 아주 기만적인 혼잣말이다. [염병할, 배고파 죽겠네.] [그러게 도시락을 1교시 끝나고 까먹는 놈이 어디 있어?] 서래는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금방 [징영이형, 정호가 배고프대. 우리 KFC가자아~ , 응?] [새꺄, 찡찡대는 소리 내지 마, 징그럽다. 얌전히 그림이나 그려.] 그러자 풀이 죽은 서래는 오리걸음으로 나한테 오더니 주저앉은 채로 엉겨붙었다. [현우혀엉.. 배고파 배고파....] 초롱초롱초롱초롱.. ** 녀석은 진정 강아지스럽다고밖에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을 갖고 있다. 루벤스가 그린 어린 아 이처럼 입술을 비쭉 내밀고, 까맣게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응, 끝나고 사 줄께.] [지금 가아!!] [교문에 학주가 있을 텐데?] [내가 안내하지.] 진영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서래는 완벽하게 삐진 표정을 하고 진영이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우 씨.. 진영이형은 현우형이 가자니까 금방 반응하는군? 이렇게 사람을 차별할 수가!!] [과연 네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 그럼 가지 말까?] 위에 제시한 것이 사건 발생의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놀라운 녀석들. 테니스장 뒤쪽으로 침투한 후에 보니 옆에 붙은 국민학교로 통하는 부분의 담에 개구멍이 하나 있 었다. 학교 건물에서는 보이지 않을 위치이지만, 우리는 신중한 낮은 포복 자세를 취하고 국민학교로 탈출했다. 운 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늘 그 장소로 출현하는 고등학교 형들을 보는 모양인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차원의 문을 통과한 우리는 아이들에게 의젓하게 손을 흔들어 타의 모범이 되어 주고, 실로 영웅다운 담대함으로 길 건너 의 KFC로 침투했다. 전리품은 닭으로 된 각종 식량들이었다. 고지를 정복한 후 정호가 갑자기 심각 모드로 돌아섰다. 잘 생긴 이마에 생긴 찡그린 세로주름들. 심각한 눈. 선천적으로 불만에 가득한 표정을 가진 녀석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나는 닭이 먼저라고 생각해. 진화 단계 상에서 우리가 '닭'이라고 규정하는 모든 특 질이 이 동물에게 나타난 것은 한 돌연변이 개체가 성체가 되어 닭다운 특징이 발현되었을 때였을 테니까.] [그럼 그 닭이 알 안에 들어 있었을 때는 닭이 아니었단 말야? 그리고 일부 닭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성체는 닭이 아니고? 왜 닭족이 인간족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건데? 그 첫 번째 닭의 엄마는 그 애가 특별히 새로운 종족이라 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서래가 응수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해 보려다가, 골치가 아파져서 그냥 웃었다. 이럴 때 진영이가 하는 말은 뻔하다. [알 수 없지.] 일순 모두 허무에 빠져서,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일단 인간이 닭이라고 부르는 동물의 실체를 미각을 통해 확인해 보자는 데 말없이 의견일치를 보았다. 서래가 헤죽 웃는다. [뭐 어때? 닭도 달걀도 맛있쟎아. 그걸로 오케!] [하나도 오케하지 않아, 설왕설래說往說來, 너는 얼버무리면 다라고 생각하겠지.] [진영이형!!!!!! 내 이름 갖고 놀리지 마아!!!!] [더 있지. 달마가 왜 동쪽으로 갔는지 알아?] [뭐....왜...?;;;](긴장) [서래가 서래西來(서에서 오다)했기 때문이겠지.] [혀어어엉! ㅠ.ㅠ 하나도 재미 없어!! 맨날 나만 갈궈!] 그 때 정호가 끼어들었다. [현우형은 검을 현玄 에 비 우雨 일까?] [...에, 현명할 현賢 에 넉넉할 우優 야.] 진영이가 싱긋 웃었다. ['검은 비' 쪽이 훨씬 어울리는걸.] [그래, 현우형은 전혀 현명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아. 오늘의 물주가 된 이 현실이 그대의 현명하지 못함을 입증하며, 우리가 돈을 보태야 했다는 것은 넉넉하지 못함을 보여주지.] 나는 웃고 말았다. 응, 얘들은 날 웃게 한다. 즐거워, ...KFC 안에 울려퍼지는 가요와 닭 냄새, 햇살 드는 창가에 친구 비슷한 녀석들과 앉아서. 이런 것이었어 내가 바라던 일상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따뜻한 것은, 행복일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 감정을 눈 앞에 들어 뿌리 부분을 살펴보면: 이 싸아한 불안감은 어쩔 수 없군. 다시 돌아가면 이 놀 았던 시간 만큼 밀린 그림과 공부를 해치워야 해. 사실 그 조마조마함 때문에 이 시간이 더욱 맛난 것도 사실이었 다. 하지만 또 하나......내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그. 그 때 서래가 말했다. [우와, 외제 차다.] 서래의 시선을 따라가자, 창 건너로 새카만 스포츠카가 한 대 서는 것이 보였다. 햄버거를 베어물고 아무 생각 없 이 쳐다보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고 내리는 것은 산이다. 잘못 볼 수가 없다. 저 태연자약한 걸음걸이, 갑자기 멈춰서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보충수업이 끝나 가는 학교의 교 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학주에게 뭐라고 잠깐 말을 하더니, 음, 무사통과다. 예의바른 목례도 잊지 아니하 고. 그 동안 그 자동차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는 품이, 산이를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산이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들어가 사라진 한참 후에야 차가 출발했는데, 우리가 멍하니 보고 있는 속에 유턴을 해서 천천 히 지나갔다 KFC 바로 앞으로. 허걱... 차 안에 있는 것은, 웬 날카롭게 생긴 아저씨였다 @@;;;; 갈 데까지 갔군, 윤 산! 하지만 아저씨라도 미인이긴 했다. 창백한 얼굴에 입 술이 꽃처럼 선명하고 나른한 눈동자: 나는 산이 취향을 지겹도록 잘 안다. 하하핫.. [............] [......윤 산 선배 형인가 봐.] [,,,,,그, 그렇겠지, 조금 안 닮긴 했지만?] 대화가 혼란해졌다. 윤 산, 대담하기도 하여라, 학교 앞에서 헤어지다니 말야. 산이는 지금 아드레날린이 올라서 천 사처럼 발그레한 뺨을 하고, 선생에게 설득력 있는 변명을 하고 있을 게다. 게다가 저 무모함 때문에 오히려, 별로 의심스럽지 않은 장면으로 희석되는 효과가 있겠다. 이놈들에게는 왕 비현실적인 풍경이었을 거다. 상상도 못하겠 지. 표진영은 어떨지 모르지만. 흘낏 보니 별 생각 없는 듯이 닭다리에 열중한다. 그리고 딱 한 마디, [나는 바이퍼보단 포르쉐가 좋아.] [난 역시 무스탕!] 덕분에 스포츠카 이야기로 화제가 급히 넘어갔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제길, 아까 한참 서 있던 그 차가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산이라는 태양 주위로 새로운 위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주 금방이었던 것이다. 그럴 줄 미리 알고 있었는데, 망할, 왜 이렇게 가슴 속이 타는 것 같은 거야? 역시 담배를 끊어야 할 것 같다. ....끊긴 뭘 끊어? 그냥 빨리 죽고 싶어, 가능하면 지금!!..... 대체 산이 이 자식은 어떻게 되어먹은 놈이란 말야? 은수가 죽었쟎아. 나와 헤어진 것 상관 않고 살아갈 놈인 것 알았어. 나 따위가 있건 말건 네가 무슨 영향을 받겠어? 단지, 은수는, 정말 죽었단 말야. 사라졌어! 그건 장난이 아냐, 윤 산. 네가 나중에 깨달은 후에도, 은수에게 사과할 방법이란 없어. 제길, 그런 것 꿈도 안 꿔, 단지, 슬픈 척이라도 해 봐. 잘 하쟎아? 그럴 필요도 못 느낄 존재였어, 은수라는 한 아이가? 그 애도 언젠가는 바로 이 KFC에서 닭을 맛있게 먹으며, 그 애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한 적이 있었겠지. 갑자기 햄버거 맛이 이상해졌다. 빵은 두꺼운 종이로, 고기는 구두창 같은 맛으로 변해 버렸다. 일개 햄버거가 슬 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제기랄, 그 햄버거는 정말 이상하게 눈물겨웠다. 난.......은수가 죽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먹고 있을 수가 있는 거 야? 왜 땅이 갈라져서 저 뻔뻔한 산이놈과 나를 빨아들여 버리지 않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산이가 늘 웃으며 말한 대로. 나는 아까와 조금도 다름 없이 빛나는 웃음소리 속에 부 드럽게 싸여 있었다. 갑자기 녀석들의 실없는 농담에 화가 치밀었다. 너희는 몰라. 언제나 즐겁겠지. 어떻게 이 녀석들은 언제나와 다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고 빌어먹을 태양은 왜 이리도 밝고... 한 사람의 죽음이, 진정 이 세계의 존망과 아무 관련 없는 것이란 말인가? 정말 우리는 그런 바람 속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단 말인가? 그 때 갑자기 진영이가 내 뺨을 건드렸다. 흠칫 놀라서 옆을 보니, 약간 찌푸린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그래, 정말 나 를 염려해 주는 것 같은 눈이었다. 어쩐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리고 굳건한. [들어가자.] 어쩌면 이 놈은 이해해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잠시. . 그럴 리가 없다, 이 세상에 다른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아. 가족이라도 이러한데, 세상에 누가 그럴 수 있을 까? 그것이 새벽 두 시에 식탁에 앉아 고개를 푹 수그린 나의 결론이었다. 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머니, 두 시간 동안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은 나. [성적표를 받았으면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니! 그걸 숨겨 놓는다고 누가 몰라?] 내 방 뒤졌어요? 라고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냥 나는 화를 속으로 삭였다. 나를 키워 주고 밥 먹여 주 시니까, 내 방을 뒤질 권리가 있는지도 몰라. 그런가 부다. [.........] [그리고 너 정상학원 교재에 필기 하나도 안 되어 있더라? 주말에 학원 가는 것 맞아? 아버지한테 또 무슨 소리 들으려고 그래? 너 미술 하고 싶대서 시켜 주었쟎니! 그럼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그럴 줄 알았더니, 그리고 너 저 번 주에 술 마시고 들어왔지? 미술학원 안 갔어? 입시 얼마 남았다고 그러고 돌아다니니? 미술학원도 빠지고, 거 기 한 달에 얼마인 줄 알아??] [..........] 후우우우......어머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시고는, 또 똑같은 말씀을 거듭 들려주신다. 똑같은 말을 왜 되풀이 하 시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더 말 잘 듣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내 빌어먹을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도 아 니며, 오히려 낼부터 잘 해야겠다는 각오가 잠시 싹텄다가 같은 잔소리를 계속 듣는 분노에 타올라 없어져 버리려 한다. ....난 정말 왜 이렇게 비뚤어진 녀석일까? 나를 위해 새벽 이 시간까지 얘기를 해 주시는 거쟎아. 그래서 난 식탁을 쳐다보면서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만해 여보, 이제 들어와서 자!] 아... 안방이 열리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순간 흠칫 떨었다.. 아버지가 듣고 계셨구나..! 이런 젠장, 눈물이 나오려 했다. 또 실망시켜 드리고 말았쟎아..! 엄마, 차라리 내 방에서 문 닫고 야단 치든지 하지, 너무해..!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내 성적표를 보았을 리는 결코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미술대회 상장 받 아와도 들여다도 안 본 사람이, 내 형편없는 성적표는 왜 관심을 갖겠어? 처음에 나는 아버지의 냉담함에는 하나 의 뚜렷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내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계집애 같으니까, 내가 형처럼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착한 아들이었다면 날 보아 주리라고 생각을.. [정말 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네 형은 정말 문제가 하나도 없어서, 우린 고3 부모란 말의 뜻도 몰랐는데, 넌 정 말 공부는 못하면서 겪을 건 다 겪고 지나가는구나! 응??] [...........] [할 말 있으면 해 봐. 우리 대화를 좀 해 보자.] [...........] 나는 말 못해. 말하다 보면 울음이 나와서 울먹이면서 말을 더듬게 될 텐데, 그런 추태를 보이기는 정말 싫거든. 그냥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뭐, 사실 내가 잘한 건 하나도 없쟎아. 그냥, 내일부터 잘하지 뭐. 나 하나 입닥치고 열심히 하면 온 집안이 평안 할 텐데. 그걸 알고 있는데 왜 실천이 안 되는 것일까? 공부하다 보면 마냥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지고... 왜 자기 조절이 안 되는 걸까? 그래서 내가 얼마나 죽고 싶은지 알아, 엄마? 그냥 안 된단 말이야.. [이 답답한 녀석아, 말을 좀 해 봐라.] [..............] [....니 형은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하쟎아? 민우의 반만 닮아 봐라! 너 미술 하고 싶어 할 때도 형이 대신 말해 줬 지. 정말 남자애가 왜 그러니?!] 남자애다. 그런데 혹시 내가 누구랑 자고 다녔는지 알아? 하긴, 내가 집에 친구 한 번 데려오지 않아도 이상해 하 질 않았지. 산이와 길을 걷다가 엄마를 만났을 때도, 물어보는 거라곤 걔 아버지 뭐 하시니, 걔 어디 사니, 그리고 공부 잘하니. 공부야 더럽게 잘하지. '예'랬더니, 만사 패스다. 아들이 실제로 그 우등생의 집에서 자고 오면서 뭘 했을지는 상상도 못 하겠죠 엄마? 신경 써 본 적도 없지요 아버지? 아아, 그냥 제발 날 좀 혼자 놔 둬 주었으면. [내일은 학원 가라.] [예.] 불을 껐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몇 시간이나 혼자 앉아 있었다. 어둠 속을 뜷어져라 보면서. 너무 기분이 음울해서 꼼짝도 하기가 싫을 뿐. 하지만 잠은 자야 내일 학교에 가겠지? 휴지를 뜯었다. 커터로 팔을 살짝 그었다. 죽으려는 건 아니야, 그냥 원색이 보고 싶다. 피가 배어난 걸 휴지에 묻 혀 그 새빨갛고 예쁜 색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려 했다. 산이 말대로, 이런 건 자기최면 의 문제이겠지. 이런 짓도 오랜만이다. 그 동안 기분이 울적하면 늘 산이를 찾아가 같이 뒹굴곤 했었으니까. 그 쾌락들, 아아.. 뭐 든 다 잊어버릴 수 있었더랬는데. 그 녀석은 항상 금방 날 다시 웃게 만들어 주었었지. 칵테일을 만들어 주고, 촛 불 아래 포도주를 따라 주고, 기막히게 듣기 좋은 거짓말들을 해 주고, 내 온 몸의 성감대를 찾아 내어서 녀석 품 에서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나게 만들어 주었지. ..그건 또 다른 의미로 피냄새를 맡으러 가는 것일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할 수 없다. ...그래, 그것이 내 결정이었으니까. 후회하지 않아. 산이를 잊는 일에만 성공할 수 있다면 혹시 앞으로 내가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 을지도 모른다. 설령 희미한 냄새 조각이라도 좋으니, 얻고 싶다. 그래서 믿고 싶다 내 자신을. "Bitter" 6. "Bitter"-6. 2000.02.03 by saroni 평일에 하는 일 만큼이나, 주말에 하는 일도 정해져 있다. 하루 종일 학원에서 공부 공부하는 것. 나는 왜 그 나에게 의무로 정해진 일과 안에 돌아온 것에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이미 윤 산에게 뼛속까 지 중독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학원엔 등록하고 딱 두 번 와 봤었지. 대개는 집에서 나와 산이에게 갔었다. ...달 콤했었지. 그 녀석에 익숙해진 나머지, 이제는 남은 것에서는 오직 쓴맛이 느껴질 뿐이다. 그래도 다행히 강의실을 찾아들어 갔다. 내가 안 나와도 집에 전화 한 통 해 주지 않는 학원의 계단을 올라서, 우 글한 인간들 사이에 끼어들어, 스쳐가는 한 인간일 뿐이란 것을 절감하게 해 주는 낙서투성이 책상에 앉았다. 낙서는 대개 삐삐 번호이다. '180 센티의 잘생기고 무쟈게 성격좋은 놈임, 귀엽거나 섹시한 아가씨라면 모두 환 영.', '친구를 사귀고 싶어요, 아래 번호로 호출해 주세요.' 등등.. 서로를 애타게 갈구하는 십대의 구애들. 불특정 상대에 대한 환상들과 열정들, 어른들은 말하지: 연애 같은 것은 대학 가서 해라. 지금은 공부할 때야. 담배도 술도 대학 가서 해라, 대학 가면 마음대로 놀아도 좋다. 적어도 우리 나라엔 몇 살부터 정식으로 성교를 해도 좋다는 허락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는가? 입대 入大 전과 입대 사이에는 B.C.와 A.D. 보다 훨씬 확실한 선이 그어져 있지. 교육은 금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 우 리는 머리를 짧게 깎고 책상에만 머리를 박아야 하지. TV는 안 돼, 만화도 안 돼, 교과서의 훌륭한 말을 외워 넣 어라,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대학 문에 기러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달달 스캔해 넣어라. 그러나 대다수의 우리들은 그 책상과 교과서에 사랑에 대한 환상을 써 넣지. 나를 학교 성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내 자신으로 보아 줄, 나를 지켜 주고 소중히 여겨 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말해 줄 사람이 세 상 어디엔가 있을 거야. 내 진가를 알아 줄 사람. 우리는 가장 우울한 순간에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곤 하지. 가장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서운 압력에 시달리는 지금 현재가, 그 사람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때가 아닐까? 이 낙서들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물론 나도 대한민국의 고3 청소년이었다. ....남자애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 조금 특이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다름이 없다. 출석을 불렀다. 강현우를 찾길래 대답은 해 주었지. ....그 동안 뭐 했길래 학원에 나오지를 않았느냐, 그런 말은 기 대도 않았지만, 본인이 맞는지 확인조차 해 주지 않더군. 갑자기 강현우라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 대해 의심이 들 기 시작했다. 뭘 근거로 나는 내가 강현우라고 믿고 있을까? 혹은 살아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은수 도 유령이 된 채로, 자신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몰라. 불행히도 오늘은 진영이도 서래도 정호도 내 곁에 없었다. 급작스런 외로움이 나를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어 디 나 좋아해 줄 인간 없냐구! 윤 산 같은 놈 말고. 절대 그런 녀석은 다신 싫어! 그냥..이 많은 수강 인파들 중에 서 나를 구별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해 줄 사람 하나쯤, 이 세상에 있었으면 좋겠어. 누가 나 좀 붙들어 줘.....너무, 힘이 들어. 라는 소망을 간절히 품고 선생을 따라 화학 원소명을 주문처럼 읊조린 결과, 그 소원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것이 아니다. 특히 제멋대로인 것으로 유명한 에로스라면. 그는 아프로디테의 자식인 동시에, 아레스의 아들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이런 건 산이가 할 만한 말이지 내 대사는 아닌데, 작가가 자기 현학을 도저히 주체할 수 가 없다는군. 불쌍한 인간이지. 덜 익은 벼에 텅 빈 수레: 그렇게 사로니를 기억해. (ㅡㅡ;;;너....죽었어. 해피엔딩이 라고 보장해 줬더니 아주 막 나가는군.. 두고 보자?) 쉬는 시간에 담배 피우고 들어오니까, 비어 있던 내 옆자리에 어떤 놈이 턱하니 앉아 있었다. 그냥 그런가 하고 수 업을 들었지 나는. 누구인지 쳐다 볼 생각도 않았다. 한창 물리의 심오한 세계에 빠져 보려고 시도하는데, 그 놈이 나한테 딱 붙어 앉는거야. 그리고는 다리에 그 녀석 손이 스쳤어. 그 때 까지도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 누가 닿는 게 귀찮아서 옆으로 약간 비켰는데, 계속 따라 붙는거야.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쳐다봤는데, 글쎄 이 자식이 내 다리에 손을 턱 올려놓더니, 더듬기 시작하더라고!!!!!!!!!!! 망할! 나는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 버렸어. 지하철 치한에 대한 대처법에는 나름대로 익숙해 있지만, 여긴 강의실 한복판이쟎아. 누가 눈치챌까 봐 이 새끼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쳐다볼 엄두도 나질 않았어. 소리 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리를 옮겨 버릴 배짱도 없고, 완전히 그 자리에 굳어서 앉아 있었지. 셔츠의 등이 식은땀으 로 젖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어. 녀석의 손길은 더 집요하게, 용납할 수 없는 지역까지 습격을 감행하고 있었지. 이,,이걸, 뺨을 한 대 때려버려? 벌 떡 일어나서 이 놈의 멱살을 끌어잡고 강의실을 나가는 나를 상상했지. 그러나 실제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려 보는 행동이 겨우 가능할 뿐이었는데, 굉장히 멀쩡하게 생긴 우등생 타입이더라구. 나를 보고 해맑게 웃는 그 얼굴 은, 귀공자 스타일이란 생각까지 들었어. 음, 대학학원 선전 하는 놈 같더군. 내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밀치니까 놈은 그제야 왼손을 책상 위로 올렸다. 그리고 노트를 끌어당겨 뭔가 열심히 쓰기 시작했어. 내 눈 앞으로 내밀더군. '나랑 사귀자.' 헉... 뭐, 뭐냐, 이 녀석은? @@* 단도직입적이고 느끼하기 짝이 없는 소행 하나하나가 윤 누구하고 너무 똑같아 서, 나는 소름이 쫙 끼쳤다. 내 표정을 보더니 녀석은 노트에 몇 자를 더 썼지. '네가 내 이상형이어서 그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험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 워이, 워어이, 저리 갓!! 스릴과 서스펜스 속에 수업이 거의 끝날 때가 되었어. 벨 울리지 마자 튀어 일어나려고 가방에 책을 주섬주섬 챙 겨 넣었다. 그러나, 빠져 나가기에는 너무 사정권 내에 있었는 걸. 녀석은 뒤에서 보면 친한 친구로 보일 정도로 다정하게 내 어깰 '꽉' 잡더니, 오른팔을 걷어 올려 나에게 보여주는 거야. ...칼자국이 주욱 나 있었어. 순간 오한이 들어서, 부르르 떨어 버렸지. 옆에서 그 녀석이 키득 웃는 소리가 났다.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진천고의 한상헌이야." 진천고라면, 카라파의 핵심이 되는 곳이다. ....그리고, 날라리 중엔 곱상하게 생긴 놈들이 알고 보면 진짜 무섭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야.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얌전하게 녀석에게 끌려갔지. 넨장, 당하고 말지 뭐.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 해? 깡패들에게 몇 대 맞아 봐. 혹은 칼 넣고 다니는 놈하고 사귀면서 그 소행을 옆에서 지켜보던지. 한 마디로 진 짜 윤 산 같은 놈이라는 것이 상헌이의 첫인상이었어, 그래서 따라갈 수 밖에 없었지. 그렇게 그 놈을 기억해. 학원 옆에는 아파트 건설 예정인 부지가 있었는데, 작년까지 주민들이 농성을 하다가 결국은 반쯤 헐린 상태로 공 동주택들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지. 그는 그 중에 컴컴한 빈 집 하나로 나를 데려갔다. 난 왜 이렇게 바보같을까? 이곳까지 가만히 따라오다니,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말이야. 뚫린 콘크리트 벽 사 이로 휘어진 철근들이 비죽이 나와 있었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불고 차 소리가 들렸지. 소리를 지르면 바깥에 지나 가던 누군가가 구해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용기는 없었다. 목에 서늘한 것이 닿 아 있었지.... 지나가는 차의 전조등 빛을 반사하여 칼날이 섬뜩하게 반짝였어. 아직 초가을이라서 날은 그리 춥지 않았지만, 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착실하게 생긴 녀석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 무서워 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께.] 녀석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내 턱을 들어올려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구경하는 것이었다. 울지 않을 거 야... 젠장, 왜 떠는 거야 강현우! 처음 당하는 것도 아니쟎아! ....라고 스스로에게 외쳐도, 떨렸다. 실재하는 칼이, 처음 만난 놈의 손에 들려 '내 목에' 닿아 있다는 것은, 어떤 관념보다도 강하게 작용한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 다. 뭐가 무서운 지도 모르겠지만, 계속 떨고 있었다. [진짜 이쁘긴 이쁜걸. 역시..] 그 다음의 말은 녀석의 입 안에서 조용히 삭아들었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다. [어때, 애인이랑 다정하게 콩 깔래, 아님 그냥 심플하게 폭행당할래? 나랑 사귀겠어?] 싸..싸이코 아냐 이거....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온 것은 겁에 질린 신음소리 비슷한 거였다. 칼이란 거, 진짜 차갑다 여러분. [...으, 으응..] [그러면.... 첫날밤이니까 선택권을 주도록 하지. 아래가 좋아, 위가 좋아?] [....아..시...싫어, .. 난..! ]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착한 이웃집 형 같은 웃음을 짓더니, 칼로 내 셔츠를 한 조각 찢어냈다. 그걸로 내 입을 틀어막고, 계속 옷을 찢기 시작했다. 그 아래 있는 내 몸에 상처가 나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 고....!!! [으읍....읍!!!!] 으아... 확! 확! 내 몸에 대고 성냥을 긋는 것 같았어. 나는 그걸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뭍으로 끌어내어진 물고기마 냥 버둥거렸지만, 상처만 깊어질 뿐이었지. 상헌이는 나를 꽉 누르고 있었다. 프로페셔널하게 내 가슴 위에 타고 앉아서 무릎으로 양 팔을 눌러 놓고.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몸부림도 통하지를 않더군. 눈물이 고였지만 나는 최소 한 울지만은 않겠다고 다짐했지. 우는 모습을 보이면 이 미친 놈이 만족하고 부드러워질 지 모르지만, 제길..! 난 그래도 남자라구! 시팔! 하지만 그만 좀 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으윽...읍.. . .. 읍!]] 장판이 군데군데 벗겨진 바닥에서 그리고 그는 나를 뒤에서 찢었다. 눈에는 어둠, 귓가에는 거친 숨소리, 피부가 닿을 때마다 끔찍한 쓰라림, 그리고 무자비한 삽입. {{{아악!!!}} 팔을 한 바퀴 휘둘러서 안은 채 내 목에 여전히 칼 을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당했다. 놈이 밀어붙일 때마다 목에 나는 얕은 상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깊고 긴 고통이 온 몸을 관통해왔다. 현실이 아 니야, 아냐, 이럴 수는 없어, 왜 하필 나한테 이런..! 하지만 상헌은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고 거듭 덮 쳐들었다. 제길,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냐? 이 자식, 강간살인마나 뭐 그런 것 아닐까? 최소한 새디스트란 것은 확 실했다. 거의 일부러 그러는 것 처럼 기술적으로, 내 안에 밀어넣고 있었다 최대한의 고통을. 내가 움찔하는 때마 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어: 그런 오싹한 체험은 처음이었지. 몇 번이었는지 모르겠어. 그런 것 세 보기 싫다. 슬슬 눈앞이 몽롱해지면서, 흔들리는 내 몸이 점점 선명히 느껴져왔다. 그리고 여기, 밀착되어 탐하고 있는 또 다른 몸이 있다. ......얼굴이 보 이지 않아서일까? 칼 때문이었을까? 애무도 전혀 없고, 산이다운 달콤한 속삭임도 없었지만, 이 녀석이 어딘지 산 이와 닮아 있다는 아까의 인상이 자꾸 떠올랐다. 특히 냄새가.. 피 냄새. 그렇지만 이 경우엔 내 피인 것이다! 도와 줘...! 나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산이의 이름을 불렀다. 신처럼 저 문으로 갑자기 들어와서 나를 구해 주는 영상이 어른거렸다. 만일 그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네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끝까지 따라갈 텐데. 너와 헤어진 것이 잘못한 일인지도 몰라, 네 그늘 밑에 있었다면 이럴 일이 없었을 텐데. 산아. ...너 말야, 나를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었지. ..차라리 너에게 끝내자고 말했던 날 나를 이런 식으로 거칠게 안아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사실은, 네가 화를 내고 그러길 바랬어. 내 응석이었는지도 몰라. ....미치도록, 지금, 네가 보고 싶다. 알고 있어, 전혀 내가 널 찬 게 아니지. 네가 그런 거야. 그 손으로 날 죽여 주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은수가 아니라 내가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아, 그래, 은수도 그 날 산이 너에게 깔린 채, 이런 느낌이었을 지 모르지. 이렇게 터무니없이 고통스러운데 너는 자기 욕정만 채우고, 결국 네가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을 거야. 아주 정직한 고통, 그리고 쾌락. 진영아 서래야 정호야, 산이 생각만 해도 이렇게 흥분해 버리는군, 나는, 아주 더럽혀진 녀석이다.. 이런 일 당해 마땅하지. 상헌에게서는 산이 못지 않은 피 냄새가 났다. 결국은 아주 오랜만의 쾌락이었다. [.. .. .....흑.........] 그 놈이 가 버린 후에, 나는 한참을 흐느껴 울고 말았다. 일회용 물건으로 쓰이고 나서 쓰레기로 버려진 것 같았 지. 정말 싫어... 허덕이면서 울었지. 남자애란 건 피곤해, 혼자 있는지 확인해 보고서 울어야 한다구.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누구에게도 우는 걸 보이고 싶진 않아. 더구나 이렇게 펑펑 울어대는 걸. 내 자신이 이렇게 혐오스럽게 느껴진 일은 처음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 거야? 칼 들 이대고 강간하는 놈에게 왜 느껴 버린 거지? 더구나 산이의 생각을 하면서. 왜 잊을 수가 없는 거야...!! 그냥 죽어 버릴까? 구석에 갈기갈기 찢긴 피투성이 내 옷 위에, 상헌이 놓고 간 칼이 있었다. .....아주 쉬워.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그 반짝이는 예쁜 날을 들여다 보았다. 산이처럼 번쩍거리는, 내 얼굴이 비칠 정도로 좋은 날이다... 어린애 같은 얼굴. 한 꺼풀만 벗기면 그것은 정욕에 흠뻑 빠진 얼굴. 그래, 은수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은수............ 내가 지금 죽으면 용서해 줄 수 있겠어? 나를, 그리고 산이를. 산이도 실은 가엾은 애란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가련한 녀석이야. 한 번도 괴로워해 본 적이 없는, 다시 말하자면,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었을 그런 녀석이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 놈은 그렇게 살아가야 할 거야. 네가 죽어도, 내가 죽어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단다. 참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 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우, 살아서 평범한 녀석이었으니, 평범하게 어느 연옥 정도에 가 있는 모양이다. 부디 구천에 떠돌고 있지 않길 바래. 그리고 나도. 멍한 눈으로, 방 안을 한 번 둘러 보았다. 정녕 이것이 이 세상의 마지막 풍경이려나? 그리고 막 손목의 동맥을 찾아서 칼을 들이댔는데.... 그 때, 갑자기 녀석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진영이, 서래, 정호. 산이도 부모님도 아니고, 그 놈들만. 내가 죽으면 슬퍼하겠지? 아냐, 금방 잊고 잘 살 게야. .....모르겠다. 나 처럼, 마음에 묻어 두고 두고두고 생각을 할는지도. 어두운 그림자처럼 어깨에 지고 다닐지도 몰 라. [..................] 갑자기 눈물이 막 나오면서, 엄청나게 보고 싶더라니까 그 녀석들이. 그 애들이 슬퍼할, 잠시라도 나 때문에 아파 할 걸 상상하니까, 내 마음이 쿡쿡 쑤시는 듯이 그렇게 아팠어. 이상한 일이지. 어쨌든, 죽더라도 여기서 죽는 것은 그 놈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강간당하 고 자살한 선배라,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니쟎아. 가죽도 이름도 못 남긴다 하여도, 최소한 조금 더 품위있는 시체를 남기자, 조금 더 나중에. ........미안하다 은수야, 나, 조금 더 값있게 죽을게. 괜찮겠지? 그냥, 그 녀석들이 보고 싶은 걸. 날을 한 번 손에 쥐었다 놓자, 피가 표면에 묻어 나왔다. 감각은 시각의 뒤에 따랐다. 화끈! 그래, 나, 아직 살아 있어. 그래서 나는 옷가지를 대충 주워 가리고, (상헌이란 놈, 정말 옷의 원형을 판별할 수 없도록 헤쳐 놓았다. 나, 정말 용케 살아 남았어.) 바깥의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서 정호에게 연락을 했지. 진영이는 상헌이란 놈 찾아서 죽여 놓을 테니 곤란하고, 서래는 너무 순진해서 이런 꼴 보이기 싫어. 그래도 정호가 젤 낫지 싶었다. 짜증은 많지만 그나마 냉철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정호의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가 빨갛게 되었다가 다시 노란 색에서 하얗게 변해 가는 것을 미술적 인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마티스 그림 같았다. [.......................맙소사.](이상한 표정. 판독 불가.) [....피는 대강 멎었어. 옷 줘.] [현우야, 앗, 아니 형, 괜....찮아? 저어기, 병원이라도, 그러니까 일단은 치료를, 에..] (저건 허둥허둥) [그냥, 집에까지 부축해 줄 수 있겠어? 미안.] [....형, 의외로 침착하네.] (저건 안심.) [....나 이런 일 처음 아냐. 걱정 하지 마.] [뭐.....?!?] (경악!) 나는 앗차 싶었다. ...공연히 말했나 싶었다, 그래, 정호가 동성애자를 싫어 했었던 것 같은데, 아아... 겨우 사귄 친 구란 걸 이렇게 잃는군. 내가 피가 부족해서 정신이 없었나 봐. 나는 정호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의 표정을 확인하 려고 조심스럽게 그를 응시했지. 그런데, 조금 달랐어. 저건 어떤 감정의 표현일까? [.형, 혹시 게이야?] 나는 용기를 내어서 대답했지. 씨팔, 이 이상 바닥으로 깔릴 기분은 없겠지. [응.] 얼레? 정호는 내 상상대로 나에게서 후다닥 떨어져 서는 대신에, 나를 한 번 안더니, 정말이지 다정하게 부축해 주었어. 어... 또 눈물이 나더군. 너무 따뜻했어. 과분할 정도였어. 세상은 내 상상대로 돌아갈 때가 한 번도 없었긴 했지. 그래도, 일상이라고 생각하던 내 친구들, 그 이면은 또 새 롭더군. 정말 인간이란 것은 얼마나 복잡하고 깊은가. 내 상상력의 범위는 얼마나 얕은가. 정호의 목소리는 침착했 다. 나. 서래를 좋아해요. 현우형은 이해해 줄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파왔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화만 내는 듯이 보이던 이 녀석이, 그런 고민을 갖고 있었구나. 나도 모르게 은수와 윤토형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려 했다. 정호는 의젓한 척 하면서 나를 부축했지만, 코를 한 번 훌쩍였다. [나 바보 같지 않아요? 그냥, 나한테 그렇게 신경 써 준 녀석이 서래밖에 없었다는 이유 뿐인데, 그렇게 좋아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이유 같은 건 나중에 갖다 붙인 것일는지도 모르죠. 그냥....하루 종일 생각나요. 그 애가 옆에 있지 않으면 나는 그냥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리고, 녀석이 만일 알아 버린다면 나는 죽어 버릴 거예요. 알았죠, 형? 난 친구로 있는 이 상태에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절대 얘기하지 말아 줘요, 형을 믿고 이런 고민 말한 거니까! ] 그 녀석이 놀자고 한 마디 할 때마다 이후의 행복감과 평화, 정적. 우리 꼬마가 옆에 있고 닿아 있다. Honesty is the best policy라고, 그래 알엇! 이론적으로는!!! 느낀 것은 일종의 따스한 아픔이었다: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맞기를 바라며, 나도 내게 내어 준 정호의 어깨를 힘 주어 안아 주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Bitter" 7. "Bitter"-7. 2000.02.04. by saroni 일이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주욱 늘어놓고 나서, 나는 한참 정호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빌어먹을, 뭐 그런 미친놈이 다 있어? 젠장, 확 고소해 버릴 수도 없고, 으아..열받아, 현우형, 형도 문제가 있어!! 그렇다고 그렇게 그냥 따라가는 놈이 어디 있어? 젠장! 내가 미쳐 버리겠네!! 그렇게 빈틈 투성이니까 이상한 쉐이 들이 따라 붙는 거 아냐! 가방에 짱돌을 하나 넣고 다니다가, 담에 또 그런 일 생기면 기회 봐서 졸라 후려패 버 렷! 물어뜯어 버리라구!!] 정호는 계속 야단난리를 치면서도, 우리 동까지 바래다 주었지. 음, 자살해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어. 나를 걱정해서 그렇게 열렬히 그 놈 욕을 하고, 나한테 짜증까지 내다니, ...기뻤어. 지나고 나면 왜 그랬던가 이상할 정도가 되긴 하지. 왜 그렇게 죽을 정도로 괴로워했지? 왜 그렇게 방금의 감정을 거의 씻어 내도록 기뻐했지? 그러나 그 순간 순간의 감정들은 '진실'이었어. 산이 그놈이라면, 우주적 차원에서 시 공간의 상대적 관점과 해석의 다양성을 종합해 보면 진실이 강 위에 있든 강 아래 있든 상관이 없으니 주관적으로 생각한 바만이 진실이 될 수 있다는 빌어먹을 해체주의틱한 헛소리를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달라. 진실이 진실이지 그럼 뭐야? 내 고통도 진실이고 정호가 보여준 우정도 진실이었어. 세상에 믿을 만한 것 하나 쯤은 생겼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파트 1층의 엘리베이터 옆 거울에 멈춰 서서 열심히 표정을 다듬었어. 부모님께서는 거실에 앉아 계시더군. 고개 를 푹 숙이고, 어머니 아버지가 눈치챌까 조심해서 얼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들 네미가 이렇게 몸 굴리고 다니는 걸 아시면 얼마나 슬퍼 하실까. [다녀왔습니다.] [현우냐, 학원 갔다 왔지?] [예.] 내 옷이 바뀐 것도 눈치 못 채는 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샤워를 하니까 온 몸이 따가웠다. 아프지 않은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잠시 그대로 물을 맞고 있었어. 자아, 강간 후의 충격 이야기는 그만두자. 별로 되새기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비참한 기분이 상당히 삭감되어 있긴 했 어. 정호의 위로와, 정호의 이야기들을 들어 주고 나니, 내가 아까 당한 일이 아주 옛날의 일 처럼 느껴졌지. 오히 려 곰곰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기분이 되어 있었어. 벌써 두 번째 성폭행을 당한 걸로 보아서, 나 아무래도 도화살이 끼어 있는 모양이야. 두 번째라는 것은, 뭔가 나 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 그렇게 티가 나나? 역시 내가 너무 만만해 보이는 건가.. 팔을 보니 굉장히 연 약해 보였지. 손가락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하얀 손. 정말 여자애 같은 손이야.. 산이는 내 손가락이 섬섬옥수 라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곤 했지만, 난 내 조그마하고 힘없는 손이 아주 싫다. 그래 강현우, 정호 말대 로 깡이 없으니까 이런 일을 당하는 거야. 기합을 넣고 거울을 향해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았지만, 으음... 토라진 어린애 같은 얼굴일 뿐이더군. 부엌에 김치찌개랑 밥이 차려져 있었다. 배 안 고프다고 방에 가서 박히려는데, 민우형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TV보던 아버지가 돌아보면서 활짝 웃는 거야. [어이구, 우리 민우 왔냐? 한 잔 꺾은 모양이구나.] [예, 친구녀석이 휴가를 나와서요.] .. 무슨 상담 같은 걸 하고 싶어도, 나도 형도 늦게 돌아와서 곯아떨어지기 때문에, 얼굴을 본 것도 참 오랜만이었 지. 어릴 때는 참 가까웠는데. 그런데 형은 술냄새를 풍기면서 내 방에 따라들어왔어.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우리 이쁜 현우, 요새 공부하느라 힘들지? 라이터 좀 빌려줄래?] 내가 가진 라이터는 단 하나 뿐이었지. 산이가 갖고 다니던 거야. 무늬 없이 네모난 그냥 지포 라이터, 광택 있는 회색, 장식이라면 산이가 칼 끝으로 긁어 놓은 달 모양 뿐이었지. 크고 작은 초생달이 두 개 겹쳐 있는 단순한 모 양. 산이는 그걸 그리더니 '앗 실패했다.'라면서 그냥 날 주더군. 그리고 그 날 안에 모 백화점에서 새걸 하나 뽀렸 어. 녀석이 물건 아낄 줄을 모르는 데는 이유가 있지. 형은 불을 붙이더니 라이터를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어, 고삐리가 무슨 지포를 들고 다니냐? 이거 나 줘라.] [안돼!] 나도 모르게 빠른 대답이 튀어나와 버렸어. ...언젠가는 버릴 거야. 내가 담배를 끊게 되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었던 거야, 비록 민우형일지라도. 민우형은 내 영웅이었다. 이 말이 과거형이라는 것을 주지해 주기 바래. 나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못 하는 게 없었어. 그래서 아버지가 형을 편애하는 것도 굉장히 당연한 일이라고 오랫 동안 생각해 왔지. 공부로 말하자면 국민학교 중학교 졸업생 대표였고, 운동 얘길 하면 그 유명한 양명고 농구팀의 에이스였다구. 노래방에 가도 정말이지 못 부르는 노래가 없고, 항상 밝은 표정에 유머 감각 빼어난 키 180의 미남 이지. 무엇보다도, 미술 대회에 나갈 때마다 상이란 상은 다 휩쓸어 왔었지. 나는 최우수상이나 금상을 받아 본 적 이 한 번도 없어, 하지만 형이 받은 상장을 볼 때 마다 내가 받은 것 처럼 으쓱하곤 했다. 등교할 때 버스 같은 데 에서 여학생들이 형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면 '내가 강민우 동생이야!'라면서 즐거워 했었지. 당연히 학교에서 현 우 보다는 '민우 동생'이라는 호칭이 익숙했지. 무엇보다도, 나는 친구가 별로 없었거든. 그냥 형만 있으면 대만족 이었어. 나는 가족으로써, 다른 어떤 친구들도 모르는 형의 모습을 보곤 했지. 다음 날 있을 리코더 시험을 위해 밤을 새우며 연습을 하고, 다 해 놓은 숙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새벽 다섯 시에 새로 시작하는 무시무시한 중 학생.. 뭐든 잘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알고 보면 형의 전설은 모두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모르던 모습이 있었던 거야. 어느 날 형이 나를 불러서 부탁을 하더라구. [현우야, 나 반공 포스터 한 장만 그려줄 수 있겠냐? 형 내일 시합이 있어서 자야 하는데, 이걸 그려가야 해서.] 나는 내가 뭔가 형을 위해 해 줄 수 있다는 행복한 마음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 형이 가르쳐 준 대로 몇 가지 사항들을 잊지 않고, 빨강을 많이 써서 열심히 그렸지. 형은 내 볼을 톡톡 두드리며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쉿, 비 밀이야'라며 한 눈을 찡긋했지. 그런데 그 그림이 학교에서 최우수상을 탄 거야. 뛸 듯이 기뻤어. 그런데 형은 상장 받아와서 아버지께 칭찬을 들 으면서도 그게 내가 그린 것이라고 한 마디도 않더군. 뭐...좋았어. '역시 민우다!' 란 칭찬을 들으면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겠지 생각했다. 나중에 아버지는 내가 미술 한다니까 픽 웃었지. 그렇게 날리던 네 형도 안 하는데, 네가? 란 뜻이었겠지. 그래도 나는 그 진실을 비밀리 간직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때가 있었다. 그 후로 계속 형 그림을 대신 그려주면서도, 그냥 좋았어. 좋은 게 좋은 거라는데 뭐....라고 생각했지. 아무튼, 형이 고 3일 때 나는 일학년에 들어갔지. 형은 고 3이 되자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공부만 했고, 난 내 그림을 그렸어. 내 포스터는 입상을 했다. 왜 내 이름을 쓰면 장려상이, 형 이름을 쓰면 최우수상이 되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지만 말이야. 그런데 내 그림을 보고 우리 반으로 찾아온 3학년 선배가 하나 있었다. 미술부라고 그랬는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눈매가 날카로운 사람이었다고 기억해. 그리고 정말 스트레이트하게 말을 하더군. [민우 그림 그려준 게 너구나?]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도리질을 쳤어. 하지만 그 선배는 혀를 끌끌 차면서 [됐어. 내가 그만둔 다음엔 누가 그려주고 있는지 늘 궁금했었거든. 새 애인이 아닌 걸 알아서 기쁘다.] 그랬대. 내 조그만 세상이 뒤집히는 것은 아주 한 순간이었어. 하지만 형은 고 3이어서 도저히 얘기 꺼내 볼 시간도 엄두도 없었고, 대학에 들어가 신입생의 바쁜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에는 이미 난 묻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 때 쯤 난 2학년에 올라갔고, 산이를 만났어. 그 놈이 결정적으로 나를 거꾸로 들어 흔들어 놨지. 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어릴 때부터 바랬었지. 내게도 동생이 있었으면 나를 존경하는 눈으로 보고, 의지해 줄까? 나를 필요로 해 줄까? 나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텐데. 내 등을 보는 그 눈을 위해, 어깨를 쭉 펼 텐데. 그런데 지금, 정호가 꼭 내 동생이 된 것 같았어. 녀석은 그 날 이후로 줄창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 고민 저 런 열정들을 털어 놓았지. 온 학교를 다 돌아다니면서 이어지는, 막혀 있던 길다란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 그림이나 글을 생산하지 않으면 꼭 죽 을 듯 싶은 때이지. 그럴 때 창 밖을 내다 보면 꼭 해가 진 직후 이더라구. 밤이 덮이면 무의식이 돋아오른다. 죽여 무덤에 묻었던 생각들이 좀비처럼 불쑥불쑥 일어난다. 엄마의 얼굴이야. 그 년은 내가 국민학생일 때 집을 나갔지. 그 이후론 나도 문을 꼭 닫고 등을 돌리고 있었어, 현우형처럼 말야.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아기는 살짝 신 벗어 놓고, 맨발로 한들한들 나들이 갔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난 이 노래가 어딘지 애조를 띠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들어. ....왜 신을 벗어 놓고 갔을까? 아기는 돌아왔을까? 왜 이 노래를 떠올리는 때 마다 서래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언젠가부터, 그 애가 쉬는 시간이면 꼭 나를 찾아와서 팔꿈치를 받쳐 턱을 고이고 내 앞에 앉아 내 끄적거린 글들 을 들여다 보곤 했지. 내가 상대해 주지 않아도 음악실이나 과학실로 갈 때 항상 내 옆에서 조잘거리며 붙어 걷곤 했어. 소풍날 버스에 앉을 때, 풍경화를 그리러 나갈 때, 혼자되는 것은 상당히 쓰라린 일이지. 냉소를 띠고 딴 놈 들이 몰려 다니는 것을 경멸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동작 하나하나가 긴장을 띠어 버리지. 사실 그 녀석들은 내가 무시하는 것 조차 모를 테니까. 서래가 그걸 막아 줬어. 아무리 변덕으로 부려먹고 내 고집을 세워도, 같이 있어 주더군. 그렇게 친구 많고 인기있 는 꼬마가 '정호야 화내지 마아~' 하면서 쫒아올 때의 기분이 어떤지 알아?> <애띠고 곱지. 서래는 개나리꽃 같아. 통통 튀는 것이 해맑고 천진하고, 너무 착해. 그러니까 나 같은 놈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이겠지. 그 녀석은 해 달라고 하면 정말 뭐든지 다해 준다고. 아마 전생에 사과나무였을 거야. 아낌 없이 주는 나무였겠지. 그러니까 녀석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이 서래힌테 뭘 해 주지 못해서 애가 달아 죽 는 것이겠지. ..그런데 서래는 또 그걸 내가 달라면 냉큼 주어 버린다구. 그래서 혹시 내가 쓰러지면 그 애는 손 내밀어주지 않을까 생각을 해. 모든 걸 포기하고 날 일으켜 주려고 머물러 줄까? 이 시계는 서래가 선물해 준 거야. 어 저거 괜찮은데!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다음 생일 때 선물로 주더군. 어디서 돈이 났겠어? 누가 사 주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어머니 지갑에 손을 대는 것 같아, 나 때문에. 나는 그런 것이 좋아서 점점 더 무리한 걸 요구하고 있지. 어디까지 따라와 주나 보고 싶어. 지금 이 시계는 체온으로 따뜻 해. 죽을 때 까지 차고 다닐 거야: 서래는 언젠가 떠나 버리겠지만.> <착각들, 내가 서래를 좋아하는 것이 맞기나 한 것인지. 우정의 약간 강렬한 형태인 게나 아닌지, 혹은 단순한 집 착이 아닌지, 징조들, 그것들을 찾아서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 바보 같지? 맙소 사, 어쩌면 단지 선망일 지도. 선망이란 -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한 바람이다. 긍정적인 용어가 등장하긴 하는 군 그것보단 애증, 역시 그것이 빌어먹게 맞는 표현이야. 녀석이 내 앞에서 댕글댕글 걸어가는 걸 보고 있자면, 가끔 계단에서 밀어 버리고 싶은 이상한 충동을 느껴. 어떻게 죽고 싶어? 라고 물어본 적이 있지. 서래는 내 뜻을 알고 있었을까? 단순한 질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자 애쓰던, 나도 모르던 그 기분을? 그 애를 가질 수 있다면, 내 것이라는 보장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들, 혹시...........어쩌면. 그 녀석이 그러더군. "나는 믿어도 돼, 정호야." 웃기지 말라 그래,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어. 난 버림받을 거야. 빨리 포기해야 해. 하느님 맙소사, 제발 포기가 되었으면. 그 놈을 떠날 수 있게만 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더 이 상 바랄 것이 없겠어. > <여자애들도 많이 사귀어 보았지. 소용없어, 비교만 늘어 가. 서래의 눈이 더 예쁜데, 서래의 웃음소리가 더 맑은 데, 이런 생각만 하게 되지. 성격이야 말할 것도 없지. 하긴, 내 성깔을 버텨내는 계집애들은 하나도 없더라구. 서 래 녀석 뿐이야. 그 녀석을 안고, 그가 나에게 기대어 있고, 그 녀석의 냄새를 맡으며 그 농담과 재롱에 웃어주며 네가 나를 믿고 나를 제일 필요로 하고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세상에서 나만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녀석은 뭐든지 갖고 있어. 그림 잘 그려, 공부 잘 해, 의사 집의 삼대 독자 외아들이야, 같은 반에서 안 친한 놈이라곤 하나도 없지. 대체 왜 나 따위를 필요로 하겠어? 사실은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어디서나 잘 살아갈 사람인 놈이쟎아. 차라리 여자였다면 강간해서 임신이라도 시킬 텐데. 내 아이를 갖게 만들어서 결혼해 버릴 텐데. ...가둬 버릴 거야, 나만 보고 나만 생각하도록. 맙소사, 그러다 잡아먹어 버릴 지도 몰라, 정말이야. 그리고 나면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겠지. 나는 다시 혼자가 될 테지. --그리고, 그렇게 한다 해도 나는 결코 믿지 못할 거야. 이 사람이 내 것이라고,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나를 생각해 준다고, 그런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야.> <말이라도 해 보라고? 형, 바보 아냐? 그 애는 정말 정상적인 한국의 고등학생이라구. 뭐라고 말을 해? "모험보다는 파멸을 택하겠다." 그 눈빛이 경멸로 변하는 것을 보느니, 난 차라리 이대로 안부터 천천히 그을려 죽고 말겠어.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이 낫지 않냐구? 전혀! 형은 이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을 모르겠지? 현우형은 늘 그렇게 천진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나는 몹시 부러워. 불면의 밤도, 서래가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공연히 뾰 족하게 대답하는 나날도, 형은 모르겠지. 내 말에 녀석이 상처받은 표정을 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 ...내 영향력의 범위 안에 있구나 싶어서 말야. 나도 모르게 은근히 질투해 주는 반응을 바라면서 그 천진한 녀석한테 내가 만나는 여자애들 얘길 해 주는데, 그 건 사실 연막이야...........나도 몰라. 단지 평안해 지고 싶어, 그냥 어서 잊고 싶어. 그러니 절대 서래에게 이야기 하지 말아! 그 놈은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겠지. 모범적인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낳아 기르겠지. .... 내가 무슨 권리로 그 잘 포장된 탄탄대로에서 서래를 끌어내려서, 내가 비틀비틀 헤매는 이 사막, 낮은 너무 뜨겁 고 밤은 너무 추운 곳으로 데려오고자 할 수 있겠어?> <나의 사막, 나의 밀림.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고, 바닥도 뚜껑도 없는 작열하는 지옥. 나는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오직 꿈꾸고 있어 떠날 날을. 그것은 날개 달린 파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지. 모든 것을 그리고 서래마저도 훌훌 벗어 버리게 되기를. 그것이 현실적으로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이야.> 그래서 현실적으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기에, 나는 우울해 버렸다. 그러자 정호는 말했다. [단지 누가 들어줬으면 해서 하는 말인걸. 내가 형에게 바라는 것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무슨 행동을 해 주는 것도 아니야. 그냥 거기 있어 주면 돼. 형은 내게 완전히 집중하고 들어 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런 것 만으로 위안이 되니까. 그래서 사이코드라마 (psychodrama심리극) 하듯이 내 자신을 비추어 볼 수도 있고. 그래도, 그렇게 눈 그렁그렁하니 쳐다보지 마, 괜히 때려주고 싶어지쟎아!] Bitter" 8. "Bitter"-8. 2000.02.05. by saroni [내가 못 살아, 또 정밀묘사 하고 앉았어요?] 그 날도 정호는 미술부에서, 내게 바짝 붙어 잔소리를 하고 있었지. [데생은 그런 게 아냐! 저기 저 석고 덩어리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문제가 아니라구! 정말 똑같이 그리려면 카메라 들고 와서 찍든지! 자 들고 가서 밀리미터 단위로 재서 그리든지! 형 눈이 보는 것 말구, 형 마음 속에 있 는 걸 그리란 말야.] [...응?] [...에잇, 귀찮아.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단지 형 그림은 너무 맥아리가 없어요. ...색깔이 없어! 정열 이 보이질 않아! 형 역시 공부하기 싫어서 적당히 대학 갈려고 미술하는..] / / [김정호! 말이 심하다!!!] 표진영이 호통을 쳤다. 정호도 그 말 해 놓고 앗 하는 표정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현우형 미안해요, 난 원래 생각한 게 그대로 입 밖으로 나와.] [..괜찮아, 네 말이 맞는걸.] 색깔이 없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세상이 온통 모노톤으로 보이는 이유는 내가 데생을 하기 때문일 까, 아니면 그랬기 때문에 내가 데생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하늘을 보면 연필로 이 정도 톤이겠구나 싶다. 나무를 봐도 사람을 봐도 흑연의 가지런한 선으로 환원되어 보인다. 심지어는 색깔 선명한 꽃잎을 들여다 보아도, 그 빨강 과 노랑이 흑백 화면으로, 순수한 회색으로 들어오며; 그 매끄러운 면에는 잔 선으로 터치를 새긴다. 그러면 구성 할 때는 어떻게 하냐구? 어차피 구성에 쓰이는 원색들은 정해져 있는 걸 뭐.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색의 조화가 아니다. 색은 머리로 배운다. 색상표를 그려 걸어두고 얘는 쟤로부터 45도 각도에 있으니 어울리는 색 이다, 쟤랑 걔는 180도니깐 보색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론들, 이렇게 하는 게 아름답다! 고 하는 학습. 그래서 내 게 중요한 것은 도안과, 1번 2번 3번에 따라 명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것인 때문에, 결국은 다시 어둡고 밝 은 것만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정호는 외려 흑백 화면에서 색채를 본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어랏... 나 혹시 색맹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생각해 보자 원색: 녹綠색을 기억한다. 물에 촉촉이 젖은 산이가 바라보고 있던 한 마리 비단 파리의 반짝이는 초록 빛깔. 아름다워! 라는 선포를 얻고 나서 얼마나 강렬하게 타올랐던가 그 색은? 그러고 보면, 산이와 같이 있을 때면 온 사방에 그 놈이 쳐다보는 데마다 갑자기 갖은 색깔이 타올라 대어서 혼란할 정도였다. 참 이상하지? 지금은 다시 보아도 그 어느 것도 퇴색되어 보일 뿐인데. 적赤색을 기억한다. 민우형의 친구 목소리, 산이에게 윤토형에게 상헌에게(... 왜 이렇게 많지?ㅠ.ㅠ)안겨 있을 때 눈을 감으면 앞이 온통 빨간색이었지. 냄새까지 속속들이 붉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 그리고 황黃색이 기억이 났어. 난 풋 웃었지. 백스테이지 갔다 온 날, 그 날 하늘은 정말 노랬다. KFC에서 떠들고 있던 우리들을 감싸안던 햇살도 좋은 노랑이었다. 따뜻하고 철없는 색. 그런데 초록 빨강 노랑 이라면........... 이건..... 신호등? ^^;; 모, 모르겠군, 왜 이런 색깔들만 기억에 선명했던 색으로 남는 것일까? 청색은 어디로? 어디- 하고 창 밖을 둘러 보았지만, 여전히 특기할 만한 색채는 느껴지지 않더군. 하늘마저도 잔뜩 우울한 청회색 이었어. 테니스 코트에 칠해진 누런 색은 온통 벗겨져 철 빛깔. 잔뜩 가지를 전정당한 나무들도 퍼렇다..기보다는 잿빛에 가까운 칙칙한 빛깔이었다. 학교를 둘러싼 고층 아파트 건물은 제법 불그죽죽했지만, 회색을 섞어 그라데이 션으로 칠한 때문인지, 내 눈에 명도비교의 느낌을 더욱 강렬히 실어 줄 뿐이었어. 그러고 보니, 나 정말 이런 식 으로 주위 풍경을 돌아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것은 주제가 아니라 단지 사람을 위한 배경일 뿐이어서 아무 의 미도 없는 줄 알았는데. 데생할 때 사람의 두상 뒤에 있는 것은 무시된다. 암튼, 지금은 대부분의 세상이 양잿물 색깔이다. 맛도 선명한. 그런데 미술학원에 오고 나서, 분위기에 더욱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진영이가 오늘 군기를 잡으려고 작심한 것 같 아. [김정호, 너 왜 현우한테 반말 쓰냐?] [진영이형도 말 놓쟎아!] [쉐꺄, 니가 나랑 같은 군번이냐? 원칙대로는 나한테도 말 높여야 하는 것 알아, 몰라?] [그래, 진영이 말이 맞아. 듣기 싫다.] .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3학년 정규와 한제가 끼어들었다. [김정호, 너 진짜 버르장머리 없다. 당장 말버릇 고쳐라.] 시팔, 왜 지랄이야? 라는 듯한 정호 표정을 보고, 나는 황급히 말했지. [괜찮아, 더 친밀감 있고 좋은 걸!] [그래도 그러는 것 아니다. 네 문제가 아니라 3학년의 위계에 관련되는 일이야.] 뭐야, 나이와 학년이 다르다고 어때서? 왜 저렇게들 눈도끼질을 하는 거지? 이건 내 일이 아닌가? 별로 중요하지 도 않을 텐데, 이...이해할 수 없어. 화실에 있던 아이들이 한 마디씩 훈계를 늘어놓자, 정호가 '허!' 하고 비웃으면 서 [뭐예요? 질투하시는군요? 내 그림 실력에 대해서예요, 아니면 미술부 마스코트와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예 요?] 하니까, 상황은 당연히 더욱 악화되었다. 슬슬 애들 얼굴이 험악해지기 시작하고, 욕질이 오간다. 그런데 방금 뭐라 고? 무슨 마스코트??? 누가????? 그 때 막아드는 것은 진영이다. 은근히 눈에 힘을 주고 [죄송해요, 정호는 제 친구니까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애들은 무쟈게 못마땅해 하면서도 마지못해 험, 험, 하면서 이젤로 조용히 돌아섰어. ...뭐, 표진영이 미안하 다, 내 꼬붕이니 내가 알아서 하는데 무슨 참견이야? 란 식으로 나오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단계에서 정호가 슬슬 굽혀 주면 좋으련만, 녀석은 비꼬는 말투로 [시팔, 병주고 약주고 다하네?] 그러자 표진영, 일어서더니 정호 머리 위에서 눈을 쭉 내리깔고 [ --- 니들 이리 나와.] 우앗, 일 나겠네.. @@ 그래도 진영인데 싶어서, 나는 욱하는 정호를 졸졸 끌고 따라나갔다. [뭐야 형, 왜 갈궈?!] 진영이는 한숨을 쉬더니, 정호 머리에 꿀밤을 딱! 하고 멕였지. [쉐꺄, 눈치가 좀 있어라. 너 요새 얼마나 씹혔는지 아냐? 현우가 좋다면 난 상관 안 해. 하지만 남들 다 있는 데서 는 그러는 게 아냐!] 아... 그랬군. 내가 생각을 좀 깊이 했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진영이는 계속 정호만 나무라고 있다. [그리고 잘난 체 좀 하지 말고.] [뭐가!? 내 맘인데 무슨 상관이야?] [...꼴통시키.] 슬슬 호랭이들처럼 빙빙 돌고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 때 갑자기 명랑한 목소리가 계단 아래 에서 울리지 않았더라면. [여러분 지금 뭐해?!] 서래였다. 양 손에 봉지를 잔뜩 들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어, 서래 웬일?] [응! 오늘 학원 쉬는 날이어서! 놀러왔지! 들어가서 과자 먹자!!] 서래가 빵끗 웃으니 화창한 봄볕이 들고 개나리가 만발하여, 녀석들은 한 번 서로 쳐다보더니 멱살을 놓고 서랠 따라 들어갔다. .....화실 안에서는 [과자다!] 라는 환호성. 뭐랄까, 단순하기 그지없는 것이 사내놈들이다....^^;; 서래는 화실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과자를 먹으면서 이 선생에게 꿀밤을 맞고 저 놈에게 농담을 걸 고, 요 그림 조 그림 돌아가며 들여다 본다. 한숨을 푸아아 쉰다. [후아아아아.... 잉. 형들은 날로 늘어가네. 좋겠다 나두 미술학원 다니고 싶어..] [서래 아버지가 엄하시다고 그랬나?] [응, 우리 아빠는 나보고 의사 하래. 병원 물려준다구.] 윤 선생님이 몹시 아까운 듯이 말한다. [그래도 한 번 말씀은 드려 봐. 너 그림 잘 그리쟎아.] [틀렸어요, 벌써 이과에 와 있는 걸요!] [그러게 누가 공부 잘 하래, 그냥 시험지 백지로 내 버려! 미술 시켜 주실 때 까지 단식투쟁 하라구.] [에이, 나 그럼 집에서 쫒겨 나.] 서래가 군중에 둘러싸여 웃고 떠드는 동안, 나는 정호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녀석, 조금도 티가 안 난다, 단지 퉁명 스러운 얼굴로 그림만 열나게 그리고 있다. 정호에게 신경 쓰느라고 나는 그만 명암을 지나치게 넣어 버렸다. 비너 스의 턱 밑이 번들번들... ㅠ.ㅠ 딴 부분에 비해 너무 어둡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지우고 다시 해도 종이가 뭉개져 서 터치가 죽어 버리게 된다. 내가 일어나서 멀찍이 벽에 붙어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며 고민스런 표정을 하고 있 자, 정호가 일어나서 들여다 본다. [현우 형님, 이리 오셔 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까의 일로 속이 뒤틀려 버렸는지, 과도한 존댓말 사용이 언어 폭력에 가까우시다. 잠자리 지우개를 들더니 [이 미천한 후배가 이런 경우에 지우개 님으로 반反 명암 넣으시는 법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어라? 녀석, 나한테 바싹 다가앉아서 엄청나게 사근사근하게 지도를 해 준다. ..........헤에. 역시나, 서래가 슬슬 이 쪽으로 온다. [우와, 정호, 신기한 테크닉 쓰네?] 정호는 대답을 안 한다. 서래 뒤에서 윤 선생님이 어이 없다는 듯 [야, 야 김정호, 니가 선생이냐? 게다가 고3한테 이런 흑도사파黑道邪派 의 길을 가르쳐 주면 어쩌겠다는 거야?] 정호가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보는데, 변호하고 나서는 것은 서래다. [에이, 윤 선생님, 재미있쟎아요오.] [재미? 좋지. 하지만 김정호, 그런 건 대학 가서나 찾아라. 정석대로 그리지 않으면 미대 입시에서는 점수 못 받는 다. 성실한 그림이 최고야, 서래 그림처럼.] [우왓, 앗! 감사합니다.] 서래는 긁적거리며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녀석 답지 않은 침침 모드가 되더군. [그래도, 할 수 없으니까요.] 잠깐 네 사람 사이의 공간에는 침묵이 가루되어 펄펄 날렸지. 시멘트 가루 같은 회색이었어. 서래에게도 저런 목소 리가 있었구나. 그러나 그 가루들이 퇴적되기 전에 데미지에서 회복된 서래는, 정호에게 그 동안 그린 걸 보여 달 라고 저 쪽으로 끌고 갔어. 윤 선생님은 정호가 해 놓은 것을 못마땅하게 들여다보더니 처음부터 다시 그리라고 하시더군. 엇, 그런데 뒷장을 들여다보니 구성 그릴 때 여기다 물감 테스트를 했었나 봐. 에엣.. 한 장 남은 줄 알고 스켓치북 안 사 왔었는데. 가장 가까운 화방은 사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윤 선생님께 화방 다녀오겠다는 허락을 받았지. 그런데 서래가 쫒아오는 거야. [현우형, 현우형, 같이 가아!] [어? 집에 가려고?] [헤헤^^ 정호가 '건담 마크 2'조립식이 갖고 싶대서. 사다 줄려구요. 사거리에 프라모델 가게가 있었거든요.] 함께 걸으면서 서래는 계속 조잘댔다. 유행하는 우스갯소리 시리즈나 게임 얘기 등등. 그리고 곧 정호 이야기를 한 다. 정호가 사귀는 여자애, 정호가 저지른 기행, 선생님에게 대들어 혼난 이야기.. 정호 정호 정호. 계속 웃으면서 들어 주었지만, 정호가 한 얘기가 생각나니 계속 신경이 쓰여서 기분이 또 꿀꿀해진다. 내가 말재주라도 있다면 운 을 떼어 볼 텐데. 그냥 혹시나 가능성이 없을까 하고 서래 말에 귀 기울였다. 서래, 진짜 귀엽구나. 제법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인상이 어딘가 날카롭고 위태로운 정호와는 딴판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비죽비죽한 머리가 병아리 같다. 이렇게 밝고 동그란 성격에 어울리게 눈도 동글, 코도 동글, 입술도 동글 동글. 얼굴도 동그스름하니 착하게 생겨서, 정말 모난 데가 없는 아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래가 갑 자기 동그란 웃음 소리를 하하하 내면서 내 볼을 잡아 당겼다. [형은 왜 그렇게 말이 없어요?] [응? 아..] [현우형 요새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야. 말도 조금 늘고.] [그러니?] 하긴. 얘들이랑 있으면 산이 생각을 안 하...... 는 것은 아니고, 훨씬 적게 하게 된다. 노랑 빛에 둘러싸여 산이가 잘 보이지 않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앗, 생각나 버렸다, 윤 산..... 암울의 그림자를 길바닥에 좌악 깔려는 나를, 서래가 붙들어 주었다. [은수선배, 죽었죠. 그 다음에 형이 이상해 졌어. 그 전에는 눈이 늘 반짝였는데.] 나는.. 은수가 죽은 뒤로, 사람들이 언젠가는 다 죽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너희를 보고 있어도 늘 불안해. 너 희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얼마나 슬퍼하게 될 지,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어. [..........] 그런데 다음 순간, 마치 내 마음 속을 읽은 듯이 서래가 [그래, 우리는 모두 죽어, 그리고 형도,] 라는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러니까 그 짧은 인생을 온통 다른 사람을 위해 슬퍼하면서 보내지 마!]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았지 이 녀석? 이런 게 친구라는 건가? [.....고마워.] [힘들면 말을 하라구, 그러면 다들 도와 줄 거예요. 사람들이 무관심해 보인다고 생각해? 하지만, 실은 다 좋은 사 람들이에요. 분명히 형 주위에 있는 사람들, 표현은 하지 않아도, 모두 형을 좋아하고 있을 걸요? 단지 말을 않을 뿐이지... 사람이 원래 그런 거 쟎아요. 하지만 마음은 달라. 서로 상처를 주기도, 얼핏 무관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나는 믿어 요.] 등등... 녀석은 순진하고 맑은 성선설 이론을 펼쳤다. 그 이상들은 내 눈 앞에서 금빛 가루가 되어 반짝거리며 떨어 져 내린다. ....오오, 세상에 아직 그런 걸 믿는 놈이 있다니..!!! 네가 윤 산을 아느냐, 전설의 아이야. 그래도 금빛은 참 이뻤다. 서래도. 그런데 불행히도, 이 이쁜 녀석은 진짜 전설적인 길치였다. [어어, 여기였는데, 현우형 미안해요 잠깐마안~~!!]하면서 그 복잡한 사거리의 온 골목을 헤집고 다니더니, [앗, 여 기도 아닌데?] [앗, 저기던가?] 하면서, 점점 사거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 중간중간 가게에서 이상한 것들을 샀다. [앗, 랭보 시집이다. 형 미안 잠깐만.. 저거 정호가 좋아할 거야!] 라든지. 그리고 결국은 길을 잃고 진땀을 뻘뻘 흘 리는 것이었다 ^^;; 그 땐 없던 만화지만, 지금 기억하는 그 장면에서 녀석은 꼭 보노보노의 포로리 같았다. 사방으 로 땀방울을 발하는 조그마하고 까무잡잡한 녀석. 당황한 서래를 내가 잡아끌고 큰길로 와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사거리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부웅.... 결국 우리가 지쳐서 돌아왔을 때에는 세 시간이 다 지나 있었다. 녀석이 하두 미안해 해서 내가 안쓰러울 지경이 었다. 괜찮다는데도 서래는 쫄랑거리며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형, 미안...ㅠ.ㅠ] [괜찮다니까 서래야. 어서 집에 가라. 늦으면 혼나는 것 아냐?] [앗 앗!! 벌써 열한 시다....나 죽었어....!! 현우형 내일 봐요!] [그래 - 잘 자!] 그런데 서래가 잠시 뭔가 머뭇거리는 듯 했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날 쳐다보았는데, 아 주 작은 소리였다. [[정호가 형한테 잘 해주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으응, 뭐?] [아냐요! 저 갑니다.. 어???] 서래가 갑자기 파싹 굳었어. 나도 그 시선을 따라서 내 뒤를 돌아보는데, 어둠 속에 걸어나오는 것은 한상헌이었어. 어....어떻게.......... [어이 현우!] 그 날 밤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어. 그런데 그 자식, 뚜벅뚜벅 오더니, 등 뒤에서 나에게 불쑥 내민 것은 글쎄 노랑 장미 한 송이였던 거야. @@ 헉... 이 자식 역시 싸이코.. 나는 서래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을 보았어.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말을 꺼냈다. [...어..떻게 .] [애인 집도 몰라서 되겠어? 가자! 그런데 옆의 걔는 누구냐?] [...후배야. 너. ..] 얘는 아무 상관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목에 걸려서 바깥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입안에 단맛이 돌 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싫어! 젠장, 기억들이 점점 선명해진다. 눈 앞에 핏빛이, 귓가엔 웃음소리, 그리고.. 그 때 부들부들 떠는 내 손을 잡아쥐는 것은 서래였어, 내 앞으로 나가서 가로막고 서는 거야. [너, 누구야? 현우형한테 무슨 볼 일인데?] [어허라? 쪼그만 새끼가 막 반말이네? 나 카라의 한상헌인데, 넌 모냐?] 서래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은수 일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카라파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까 스로 정신을 약간 찾아서, 서래의 굳어버린 어깨를 잡았다. [서래야...] [나, 나아는 양명의 서, 저, 전서래다.. 현우형을 어쩌려고?!] 이 까만 꼬마, 말까지 더듬으면서도, 상헌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 앞에 버티고 있는 거야. 어, 정말 놀랬다. 무슨 애완용 강아지가 으르렁거리며 나를 지켜주려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헌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더군. [방금 무슨 전설이라고 그랬냐?] [이...씨.. 전. 서. 래. 라고!!] [그래, 전설아, 나랑 붙어볼래?] [..그..그, 표진영 알지? 우리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진영이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걸!!] 어억! 그 말 하나로 갑자기 그의 눈빛이 변하는 걸 목격하고 우리는 숨을 들이켜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어. 하아아악, 나는 사람에게 고유의 눈빛이 있다는 것은 소설에서나 쓰 는 표현이지, 실제로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는 짐작을 못했어. 그냥 눈꺼풀의 변화에 의한 분위기 같은 걸 말하는 줄만 알았지. 그..런데, 정말, 있었던 거야. 광기를 띤 눈빛이라는 것이. 번뜩거리더군.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데, ..왜 목소리가 안 나오냔 말야!! 그런데 서래는 그 와중에서도 [형, 나 싸, 싸우는 동안 아파트로 뛰어가, 수위 아저씨 붙잡고 도와 달라고 해? 알았지?] 라고 속삭이는 거야. 뒷모습을 보니, 주먹 쥔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더라구. 그래, 그걸 보니 정신이 파짝 들었다. 내가, 서래의 선배야. 지켜 줘야 해! 나는 서래를 잡고, 내가 앞으로 나가 섰지. 알았어, 같이 가면 되는 거겠지? 라고 말하려 했지. 그런데 이 녀석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어. [. 우스울 때도 있어. ] 하고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한 마디. 이상한 눈을 한 채 미소짓더니, 얼굴이 싹 굳으면서, 얼굴 방향은 그대로인 채 눈동자가 돌아서 옆을 노려보더군. 우리는 뭐가 나타났나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그 쪽으로 고갤 돌렸어. 아무 것도 없었지. 허공이었어. [[. 피곤할 때도 있고.]] 다시 상헌을 보니까 모범생틱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어 어느 새.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이면서, 주머 니에 손을 넣더군. 뭔가 꺼내더니 나에게 불쑥 내미는 거야. 나는 서래를 감싸고 함께 흠칫하면서 [하앗-]하는 소 릴 내고 벽에 다가붙었는데, 내게 쥐어진 것은 종이 쪽지였어. [내가 보고 싶을 거야, 그렇지?] 한 마디를 남기고, 서부극의 주인공처럼 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두운 거리 저 편으로, 사라져 갔다 실루엣이 되어. 서래와 나는 그 바람 속에 한참 동안 굳어서 서 있었어. 휘이이이.... 털썩! 이건 서래가 주저앉는 소리였지. [...현우형, 그 종이 뭐야? 역시 도전장일까?] [....삐삐 번호야.] 회색 콘크리트 바닥에 노오란 장미가 가로등 불에 비치었지. 진정 강렬한 색이었어. Bitter" 9. "Bitter"-9. 2000.02.06. by saroni 언제부터 기억했던가 내가 서 있는 계절의 이름을? 그 해 가을은 늦게까지 더웠지. ...가을, 아아, 지금이 겨우 초가을이구나 하고 깨달은 것은,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운동장에 있는 진영이를 보았던 때였어. 여름 체육복을 입고 있었거든. 굉장히 눈에 띄더군, 한 동안 고개 돌리기만 하면 인파 속에서 윤 산이 눈 에 들어왔듯이, 진영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어. 그는 2학년 애들과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서래와 정호는 진영이와 같은 반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군. ..으음, 내가 무심했었지. 늘 우리가 한 덩어리로 다녔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녀석 들은 같은 반일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나만 3학년으로 뚝 떨어져 있는 줄만 알았더랬어. 정호, 서래와 떨 어져 있는 진영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국어 선생이 뭐라고 떠들어 대고, 애들은 대부분 엎어져 자고, 난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도 모래 한 알 한 알까지 스며든 저 무채색들이 보일까? 참으로 지루하고 후텁지근한 회색이었다. 아이들은 그 칙 칙하고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을 뛰면서도 신이 나서 서로 소리 지르며 웃더군. 그것은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동네 이야기였지. 대체 왜 공 하나 넣기 위해 저 고생을 하면서 즐거워 하는 걸까? 100미터 한 번만 뛰어도 목이 아프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눈 앞에 별을 보는 나는 ...신기할 뿐이었다. 쟤들은 재미있나봐? 진영이는 마크가 단단히 붙어서 공을 한 번도 받지 못하면서도, 이마에 땀을 반짝이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실은 이젤 앞에 앉은 것 보다 저렇게 큼직하게 움직이고 뛰고 웃는 것이 진영이에게 잘 어울리는 일인 것 같아,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모습이다 저건. 낯설어. 그래서 바깥의 풍경에서 눈을 잠시 돌렸어. 여느 때와 같이 내 앞은 전멸 상태로, 나이든 국어 선생님이 가엾어질 정도였지. 그래서 교실로 돌아오자 생각하면서 진영이를 마지막으로 보았는데, 그 때 진영에게 공이 패스되더군. 그리고 녀석, 가드 아래로 유연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공을 받고 땅에 퉁! 던지고 한 바퀴 돌아 빠진 다음, 그 공을 다시 잡아내더군. 춤추는 것 같았다. 기다린 끝에 때를 얻은 자의 신속명확한 동작, 드리블하는 모양이 꼭 진영이가 공을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공이 진영이의 손으로 끌려오는 것 같았지. 햇살도 녀석에게 빨려드는 것 같이, 일순 눈이 부셨어. 어어라, 저 녀석, 피 부가 금빛이네? 하고 생각하는데, 진영이가 땅을 딛고 뛰었다. 그러자 갑자기 슬로모션이 되어 눈에 박히더군. 발이 천천히 모래땅을 떠나, 바스켓을 향해 날아올랐다. 일순 공중 에서 정지된 것 같았어. 혼자 중력에서 해방된 것 같았다. 반의 반 초 정도, 녀석은 공중에서 그 긴 몸을 주욱 뻗고 있었지. 그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왔어. 그 뒤를 이어 출렁! 하고 정말 경쾌하게 바스켓 그물을 통과하는 것은 붉은 농구공 이었지. 정말 엽기적인 점프에, 엄청나게 속이 시원해지는, 명확한 슛이었다. 진심으로, 나는 그 순간 교실에 갇혀 있지 않았어. 마치 내가 진영이가 된 듯, 허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순간이 있었지. ......................으음, 그런 고로, 왜 스포츠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말, 취소. 기회 나면 한 번 시도해 볼까?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현우야, 학원 가자!] [응? 왜 벌써? 미술부는?] [오늘 체육 시간에 좀 날라다녔더니 배가 고프다. 같이 저녁 먹고 학원 가자.] [정호는?] [주번.] 우리 학교는 말했듯이 아파트촌 한 곁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7단지를 가로지르는 것이 학원까지 가는 가장 빠 른 길이다. 우리는 아파트 상가에 들러 떡볶이를 먹었지. 나는 식욕이 없어서 느릿느릿, 아버지가 보셨으면 끄적대 며 먹는다고 화를 내셨을 모양으로 떡볶이를 집적거렸어. 진영은 아무 말 없이 적당히 내 리듬에 맞추어 주더군. 떡볶이는 [너무 빨개.] [음? 순수한 고춧가루 색은 아닌 것 같은데. 색소를 좀 넣어서 먹음직한 색을 내려 한 것 같아.] [빨간색.] [.....너 정호 말 때문에 그래?] [응?] [뎃생에 색이 어쩌구 하는 소리.] [으응...]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에 그 녀석은 책을 너무 봐서 겉멋이 들렸어. 뜻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을 하는 거니까, 신 경 끊어.] [..아냐, 내 그림엔 정말 뭔가 부족한 걸.] 진영이는 떡볶이를 꿀꺽 삼키고 나를 쳐다보았다. [강현우, 네 그림이 어때서? 너 잘 그려.] [...글쎄.] [야,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섬세하게 못 그린다. 네 데생이 얼마나 잔잔하니 고운데 그래?] [난 싫어.] 실은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것은 진영이 스타일이었다. 파워풀하고, 그림자 부분은 곧장 자신만만하게 있어야 할 어둠 만치 군살 없이 선이 주어지는. [네 그림은 깊은 맛이 있어. 밑에 잔 선을 차분하게 깔아 주기 때문에, 약간 젖은 듯이 아주 분위기가 좋아. 정 선 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쟎아.] 진영이가 그 확신에 가득한 말투로 말하니까 꼭 진짜 같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은 정 선생님이 나를 격려해 주시 려고 그런 말씀을 하신 거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접어 버렸다. ...진영이는 나한테 좋은 말만 해 주는 것 같아. 기쁘려고도 했는데, 순간적으로 윤 모 군이 내 그림 보고 '이쁘다.' 하던 때가 기억나면서, 상처가 되살아 콕콕 쑤 신다. ....그래, 진영아 고맙다. 그런 말 해 주는 것을 친구 사이에 예의 지키는 것이라고 하나 봐. 짜식. 그래도 그 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고마워.] 라고 하면서 옆을 보는데, 진영이가 없다. 어? [현우, 이것 봐.] 하는 목소리는 아래쪽에서 들렸다. 잘 보니, 해가 슬슬 지는 거무레한 대기 속에, 녀석이 쭈그려 앉아서 아파트 측면의 풀밭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 다. 머리 너머로 굽혀보니, 노란 꽃이 하나, 전등을 켠 듯이 환하게 피어 있더군. [달맞이꽃이다.] [어? 이게?] 글쎄, 그렇게 노랑하니 생긋한 꽃은 처음 봤어. 방금 핀 새 달맞이꽃, 달빛이 아니라 회빛스름한 저녁 빛이라 유감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노랑 노랑하게 반짝거리 던 걸. 왜 그렇게 고와 보였던 걸까? 그 땐 몰랐지. 넋을 잃고 들여다보는 나를, 진영이가 서두르며 잡아 끌었다. [야, 학원 늦겠다 빨리 가자!] 늦긴 뭘 늦어? 와 보니 아직 애들이 올 때 까지는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진영이는 계획적이었음이 틀림 없었다. [잘 되었다. 현우, 거기 앉아 봐.] 진영이는 먹물을 벼루에 붓더니, 화선지 한 장을 헝겊 위에 깔아놓고 나를 그리겠다는 거야. 어색스러워서 굳어 있는데, 만화 그리듯이 팟 팟 하더니 벌써 끝을 냈어. 그리고는 수채화 물감을 하나 가져와서 톡톡 찍더군. [자네를 그려 보고 싶었지.] 그건 큼직한 눈동자, 빛이 한 방울 떨어져 젖은, 파아랗고 망망한 눈망울을 가진 얼굴이었어. 분위기가 신비롭고 묘했다. 젖어 보이는 것은, 그림이 아직 마르지 않았을 때문이었을까? 어떻게 단순한 먹의 획 몇 개로, 그런 순정만화 같이 섬세한 그림이 나오는지 모르겠어. 한참 뒤에야 나는 이 그림이 나를 그린 것이라는 걸 자각했지. [난..이렇게 예쁘지 않아.] 진영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현우는 무지 예뻐. 왜 그렇게 자기 평가가 낮은 게냐.] 나는 당황해 버렸어. 약간 화도 났지. ...나도 주제에 남자라고, 예쁘다는 소리는 별로 달갑지 않더군. ...게다가 그건 산이가 매일 하던 소리였지. 나, 정말 만만해 보이나 봐. 아무래도 대학 가면 권투나 태권도 같은 것 해야 겠어. [진영, 무슨 운동 배운 적 있어?] [음? 유도 했었어.... 뭐, 싸울 땐 거의 안 쓰지만. 왜?] [으응, 나도 배우려고. 대학 가면.] [이보게나, 친구. 자네는 왜 항상 '대학 가면' 일까? 지금부터 해, 오늘부터!] [음..] 그러나 나는 죄많은 고 3이다. 대학 가면 뭐든 할 거야.......하지만 지금은. 생각해 보면 무슨 기준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거지? 어른들 말씀대로 이 때의 조그만 각도 차이가 거시적으로 볼 때 우리들 인생에 엄청난 계곡이 되기 때문인가? 그 기준은 왜 대학일까? 가 보면 알 거야....라고 말들을 하시지. 다 너희를 위한 거야, 너희들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게다. 우린 몰라! 그리고 우리의 진실은 지금에 있어, 당신들도 다 십대였을 때가 분명 있었을 텐데. 난 잊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 나는 그런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기억한다. 내가 가만히 그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진영이는 부스럭 일어나더니 라디오를 틀었지. 서태지 노래가 나오고 있었어. '교실 이데아'의 중간 부분이었지. 크래쉬Crash의 강렬한 목소리가 화실 안을 가득 채웠다. 여기 적을 필요는 없겠지. 대한민국의 고삐리였던 사람 치고 지금 이 노래 모르는 사람이 있어? 얼마 나....... 그 가사는..!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지낼까?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가슴이 찢어진다. 저건, 나를 위한 노래인지도 몰라. 나도 내 사투리로 늘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대학 가면??? 하나 하나 혈관 속으로 들어와 눈물이 되는 한. 절규. 우리의 사무친 질풍노도를 위한 노래이겠지. '우리' 우리. 진영이가 말했다. [서태지의 음악은 패배자, 즉 대학에 떨어진 사람을 위한 노래이고, 신해철의 음악은 비겁자, 즉 대학에 붙은 사람 을 위한 노래라는군.] 나는 핏 웃었다. 서태지의 분노한 목소리가 내 속으로 스민다. 에너지의 형태로. 그래서 나는 진영이에게 질문할 힘이 생겼다. 왜 비겁자의 길을 택했느냐고. [...진영, 너, 미술을 정말 좋아하나 봐? 공고에서 인문계로 전학하기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진영이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면서 너어무 기뻐 하는거야. [핫핫핫!! 강현우! 그렇게 긴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엣...;;] [하하하, 나 그림이 좋았어. 싸우고 돌아 다니는 것 보다 훨씬 창조적인 일이쟎나.] 응....얘는 역시 뭔가 좀 다르다. [...내가 왜 공고를 갔느냐 하면, 중3 때 여자 친구가 임신했었거든.] [뭐, 뭐, 뭐라고???] [하하하, 결혼하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가족 먹여 살리려고 일찌감치 공고에 갔지. 그런데 애 이름까지 지어 놓고 서, 갸가 중절을 해 버린 거야. 하아.. 굉장히 허무해 버리더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그 때였다네.] 대...대단해... 산이였다면 당장 버려 버리고 시치미를 딱 떼었겠지. 이런 깊은 얘길 해 주다니, 어딘지 감동해 버렸 다. 나도 나에 대해 뭔가 말을 건네 주고 싶은데,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런데 진영이는 항상 사람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으아, 뭔가 말을 해야 해. 어색스러워서 그림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런데 저기, 내 눈 파래?] [파아아아란 색이야.] [에?] [그냥 그런 줄 알아.] 진영이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내 앞에 마주 앉아서 싱긋 웃는데, 눈이 장난꾸러기처럼 반짝였다. 난 이 녀석 참 좋아. 정호와 서래를 은근히 잘 챙겨 주는 걸 보고 있으면, 날라리틱한 애들에 대한 내 선입관이 다 깨져 버린다. 알면 알수록, 소년만화 주인공 같아. 그리고 나를 역시 보살펴 준다. 날 억지로 잡아 끌어내어 네 쪽으로 당기기는 했지만, 그 점에 대해서도 지금 얼마 나 고마운지 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려고 애쓴다. 그리고는 내 말을 잘 들어 준다. 기다려 준다. 정호나 서래 처럼 자기 말을 폭포처럼 쏟아 놓지만은 않는다: 난 들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리고 익숙하지만. 그래서 이런 침묵의 상황이 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의 요령을 잘 모르지만, 얘는....내가 말을 하는 것을 기뻐해 줘. 그리고 들어 줄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 너라면...내 고민들을 알아 줄 것 같아. 한 번도 내게 야단치지 않았지. [..진영.] / [현우야!] [네가 먼저 말해.] [..아냐, 네가 먼저..] [말해봐.] ....이런 말 해도 좋을까? 하지만, 이 녀석 정말 형 같은 데가 있어서. 라디오에서 흐르는 서태지의 음악이 나를 술 취한 듯이 감정적으로 만들었다. 나를 데워서 내 작은 말통을 약간 크게 틔워 주었다. 내 지금 가장 큰 고민, 혼자 담고 있기 벅찬 이야기. [.............................정호가 서랠 좋아하는 것 같아.] [뭐야?!] 진영이는 눈에 띄게 놀라더라구. 눈썹이 올라가고 눈이 번쩍였어. ......난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지. 내가 미쳤지!! 괜히 말했나 싶었어. 그런데, 그 다음 떨어진 목소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하지만 내용은 놀라웠어.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고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허 통재라, 서래도 그래.] 휭-- 진영이와 내 사이로 바람이 한 줄기 불어 지나갔다. "Bitter" 10. "Bitter"-10. 2000.02.10. by saroni 진영이는 남의 말을 옮기는 놈은 아니었으므로, 심플하게 [잘 됐네!] 라며 활짝 웃었다. [서래 녀석 고민 꽤나 하던데.] 진영이는 벌떡 일어났어. 그 행동력으로 미루어 볼 때 당장 달려가서 두 녀석을 붙잡아 와서 대면시킬 기세였지. 나는 당황해서 녀석의 소매를 붙들었지. 으아앗.....단순한 놈 같으니! [자.. 잠깐...... 걔들도 사정이 있으니까 고백하지 않는 거고,... 게다가 그런 이야긴 본인이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고 생각해.] [그럴까? 역시 넌 생각이 깊어.] 으윽.. 칭찬 좀 그만 해. 진짜인 줄 믿어버리겠다. 진영이는 손가락을 딱! 튀겼지. [그럼 계기를 만들자, 술을 멕이는 거야!] 그리고 진영이는 그걸 빠르게 실천에 옮겼어. 며칠 후, 수능 백일 전이라는 좋은 핑계가 생겼지. 고 3들이 학교에 서 내리는 떡과 애들이 돈 모아 마련한 엿을 받은 후, 미술부에서 표진영이 무슨 장군처럼 '나를 따르라!'하니깐 애들이 우르르 박수를 치며 환호하더군. 선생님은 서래가 포섭했어, 정호는 어디 학교 구석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진정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숨어 마시는 건 질색이라는 진영이는 결국 애들을 몰고 바깥으로 나갔지. 하지만 우리들이 무슨 돈이 있어? 라고 서래가 걱정을 했지만, 진영이는 [공서래 공수거! 空西來 空手去(빈 채로 서에서 왔으니 빈 손으로 가라)] 라며 놀리고는, 아는 사람이 하는 술집이란 곳으로 데려갔어. [에린!] [어, 표 아냐! 이게 얼마만이냐!!] 주방에서 손을 앞치마에 비비며 나오는 여자애는 꽤 예뻤어. 서글서글한 눈에 진한 눈썹이 인상적이었는데, 키가 나만하더라구 글쎄. 혹시 진영이 애인인가 했는데 [야, 우리 학교 미술부 애들이다. 이쪽은 장예린, 나와는 유치원 - 국민학교 - 중학교를 걸친 악연이 있지. 아버지 가 이 가게 쥔장이시다.] [어머, 다들 미남이시네^^ 만나서 반가워요오 ~ *^^* 난 한진고 다니고, 이름이 어려우니 그냥 에린이라고 불러주세 요.*^^*] 우와.... 여자다! 미인이닷! 착하고 애교 많을 것 같다!! 하고 다들 침을 흘리고 있는데, 진영이만 홀로 비틀거리며 괴로워하더군. [가..가증스럽다. 씹탱아, 내숭 떨지 맛!] [어머멋, 오라버니, 왜 그러시나요? 재미있지 않아요? (생긋*^^*)] 어.. 그리고는 그 애가 내 얼굴을 잡고는 들여다보더라구. [이야, 네가 현우지? 진짜 예쁘다!! 혹시 나랑 사귀지 않을래?] 난 너무 놀라서 눈만 깜빡였지. 이... 이것도 도화살의 일종일까? 후유,, 다행히 별로 진심인 것 같지는 않았어. 에 린은 내 뒤를 보며 깔깔 웃었지. [어머, 오빠, 왜 화를 내?] 진영이가 왜 화를 내지? 녀석이 뒤에서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은 내 등을 잡고 이층으로 끌 고 올라가 주었지. 호프집 안은 노란 빛이 따스하게 도는 어두운 공간이었어. 바야흐로 입시: 온갖 매스컴으로 생중계될 국가적 스포츠의 결선에 나서게 된 고 3 선수들을 위하여 건배!! 술이 돌아들고, 아이들은 금새 금새 취해서, 사람들이 많은 술자리에서 흔히 그렇듯이, 여러 분파로 갈라졌지. 내 앞에는 물론 서래와 정호와 그리고 진영이가 앉아 있었다. 나는 배가 고프고 정호 서래 눈치 보느라 긴장되어서 안주만 밝혔지. 하지만 요놈들은 서로를 멀뚱하니 보더니 경쟁하듯이 술만 들입다 마시는 거야. 진영이가 솜씨 좋게 잔을 마구마구 채웠지. 녀석도 애들 속도에 맞춰 건배해주고 그러면서 [야, 김정호. 나한테 화났었지? 이 자리에서 풀고, 다 자네 위해 그러는 거니까 닥치고 말 좀 들어요.] [형님, 난 원래 말 잘 들어.] [웃기네. 네가 말을 들어? 그럼 난 소도 들 수 있어.] [허억.... 죽일테다...] [헤헷, 징영이형, 죽으면 홍대에 묻어줄께!] 얘들은 노란 불빛, 귀여워. 술이란 참 이상한 거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는데, 가슴만 엄청 예민해 져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내 형제 같다. 그리고 평소에 해 아래선 꺼낼 수 없는 가슴을 툭 턴다. 우리들, 우리들. [살면서 뭐가 제일 하고 싶어?] [그림 그릴 꺼다.] [진영이형은 목표가 뚜렷해서 좋겠다. ...난 의사 되겠지? 정호는?] [난 섬을 하나 살거야, 그리고 고깃배. 가능하면 죽기 전에 달에 한 번 가보고 싶고.] [현우는?] [...응,...모르겠다. 대학에 가고 싶어 그냥.] 다들 뚜렷하게 제 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나만 빼고. ..기실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 별로 생 각해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가라니까 가고, 대학 가라니까 가고. 미술도, 형이 하라니까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스 륵.. 비참함이 고개를 들려 하고 있었다. 안 되는데, 술 먹고 우울해지면 평소의 몇 배는... 그러나, 언제 이 아이들이 내가 암울의 나락으로 빠지도록 놓아둔 적이 있던가? 진영이가 얼른 말을 한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일지니, 현우는 큰 그릇인가 보다.] [그래, 현우형. 아직 살 날이 많은데 천천히 생각해 봐, 그럼 어떻게 죽고 싶어?] [....값있게.] [오오! 멋있다! 한 마디로 압축하는 이 싸나이다움!] 서래가 재롱을 떨자 불빛 아래 홍조를 띤 정호가 냉소를 지었다. [세상에 값있는 죽음이 어디 있어? 죽음은 다 똑같아, 왜냐면 끝에 지나지 않거든. 그래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 자 죽고 싶어. 그리고 유언장 따위 남기지 않을 테야. 내 죽은 뒤의 세상은 나에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 해.] [정호야 무슨 소리, 죽음은 진정한 시작이야! 그렇게 많은 종교에서 내세를 이야기하는데 천국과 지옥이 없을 리가 없쟎아? 적어도 인간은 환생이라도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무 억울하쟎아!] 앞에서는 정호와 서래가 벌건 얼굴을 하고 죽음의 의의에 대한 토론에 들어갈 찰나이다. 자아, 이 쯤 진지 모드가 되면 표진영의 말버릇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과연 그럴까?] .....썰렁. 이 말 할 때 진영이 표정을 봐야 하는데 말야. 한 눈썹을 치켜올리고 사람을 똑바로 보면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 이면서 과- 연 그럴까! 라고 엄청 싸가지없는 말투로 말하면,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도 잠시 얼굴이 묽어진 채 허 무에 빠지는 거야. 저기에, 서래 같은 경우는 아예 부대찌개 냄비에 빠지려고 하는군. 표진영의 무기는 비단 주먹 만이 아닌 게지. 그렇게 말하면 진짜 할 말이 없쟎아. 기로 누르는 데 능하달까. 그런데, 내가 찾아낸 방책이 있지. 애들의 호응이 별로이면 어떻게 하나? 나 혼자 이 대답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한 번 말 해 보자. 이녀석들이 나를 창피주지는 않겠지. 술기운 덕에 용기를 낸 나는 두근거리며 목소리를 입술 사이로 내어보냈어. [....알 수 없지.] 잠시 테이블 전체에 괴기스러운 침묵이 흘렀어. 잉... 썰렁했나봐. ^^;; 이것도 사람들을 할 말 없게 만드는 진영이 말버릇 중 하나인데. 나름대로 괜찮은 대응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에잇, 나 따위가 무슨 농담을 한다구...ㅡㅡ;; 이 런 건 역시 카리스마가 중요한... [푸하하!!!!] / [뜨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 [표진영, 쌤통이닷!!] 갑자기 미술부 애들 전원이 전부 테이블 위에 포복 절도를 하는 거야. [우하핫, 표진영! 네가 졌다.] [완전히 뭐든 뚫는 창과 뭐든 막는 방패의 대결 같은 답이쟎아! 표진영을 표진영으로 제압하다!] [그러고 보니 '알 수 없지'에도 '과연 그럴까?'로 대답하면 좋겠군!! 표진영의 말빨, 드디어 자멸의 길을 걷다!!] [현우, 현우, 말을 아끼더니 일격필살의 한 마디로 우리를 구원하는군!] 어...헤엣. ....나 아마 얼굴이 빨개졌을 거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고 또 이런 좋은 호응을 얻는 것은 처음이었어. 모두들 굉장히 기뻐하더군. ...다들 진영이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나?? 응, 참. 진영이는 이 환호를 들으며 어떤 기분이지? .......표진영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내 참, 그 녀석이 그렇게 헤벌죽 웃는 것은 처음 봤어. 에, @@ 뭐가 그렇게 흐뭇한 거지? 진영이는 눈을 감은 채 만면에 귀까지 찢어질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눈을 뜨고 나랑 딱 마주치니깐 당황한 듯 하더니, 또 고개를 돌 리고 막 웃는 게야!! 뭐, 뭐냐 쟤? 라고 생각하는데, 내 팔을 덥썩 잡아 들어올리더니, [내가 졌다. 강현우 승!] 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패자는 그 페어플레이 정신을 인정받아 박수를 받았지. 승자도 물론이고. 헤헷^^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구. 신이 났어. 이야, 내 말에도 이만큼의 무게가 있구나. 진영이는 싱긋 웃었다. ['알 수 없지.' 라, 난 만사가 그렇다고 생각해. 삶도 죽음도, 그러니까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지.] [하긴 그래 형, 어떤 만화에서 읽었는데,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아시죠? 아르미안의 네딸들 中입니다.^^) 라고 그러더라.] 그리고 우리 선거권 없는 미성년자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으므로 틀에 맞추어 잘 요리될 때까지 닥치고 말 잘 들어야 마땅할 어린 것들, 심의위원회에서는 뇌가 비어 있으므로 필히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들'(오오, 이 단어 의 건전반짝스런 뉘앙스여! 꽃밭에는 꽃들이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유치원 에 모여 살아요^^ 그러니 내 예쁜 새끼들이 이상해지는 건 다 만화 탓이야, 여드름이 나는 것도. 그렇지? 나쁜 아 이 있으면 안 되는 나라, 우리 나라 졸라 좋은 나라~)로 규정하는 대한민국 고딩들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백 서 른 다섯 배는 더 매력적인 술의 신의 불법적 지휘 아래, 순전히 피지 말라니까 캘록거리면서 기를 쓰고 피우기 시 작한 담배를 뻐억뻑 피우면서, 나름대로 폼을 잡고 죽음과 삶에 대한 토론들을 계속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고이 고 계속 들었지. 아까의 승리에 힘입어, 한 마디 해 볼까도 생각을 했어. 이건 나름대로 많이 생각하던 주제였으니 까. 나는 죽음은 삶과 동등한 무게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저울에 놓인 두 추 같은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균형잡아 주 지. 그런데, 그러면 은수는....... 은수. 개죽음이었지. ............. ...서래야 정호야 진영아, 니들이 죽음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또 삶에 대해서는 뭘 안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는거 야? 그렇게 미래에 대한 꿈들을 이야기하지 말아. 은수는 말이야, 영원히 고3 이라고. 그리고 윤 산과 그리고 나는 회색으로 굳어버린 은수를 지나서 계속 커 갈 거야. 언젠가는 어른이 되겠지, 그리고 잘 살 거야. 아주 끝내주게 살 거라구. 정말 멋있게 죽을 거야, 은수를 만나서 화를 낼 수 있도록! 왜, 그 따위로 죽어버렸나구!! 이걸 봐, 아무 도 널 기억하고 있지 않쟎아..!!! 그 때 정호가 내 뒤통수를 퍽! 하고 손바닥으로 쳤다. 아얏! 놀래서 쳐다보니 [...형!] [으응?] [그 때 내가 뒈지지 못한 것은 형이 삐삐를 쳐 준 덕분이었다구.] [어?] [샹, 사람이 앞에서 말을 하는데 무슨 딴 생각을 하고 있어? 나 그 날 밤에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구. 형한 테 말한 그 고민 때문에. 세상이 너무 귀찮아서 기냥 죽어 없어지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그냥 내려왔지. 형이 날 불러 주었기 때문에.] [엥? 정호야, 무슨 고민이 있었어?] [너는 몰라도 돼 강아지야.] [치, 나한텐 말 안 해주고, 담엔 죽을 생각이면 나한테 연락이라도 해 바보야!] ............은수야. 얘들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구나. 그래, 알고 보면 지금 이 자리에서 웃고 떠드는 녀석들 중에 한 번쯤 자살 생각을 해 보지 않은 녀석 없을지도 모 르겠다. 우리들 다들 괴롭고 외롭지. 알고 보니 그렇단 말야 우리들. 은수........... 너는 좀 덜 심각할 수는 없었던 거냐? 조금만 더 강할 수는 없었어? 살다 보면 이렇게 '우리'를 생각하며 행복할 수 있는 때도 오는데, 왜 .... 포기한거야 .... 왜 도망친 거냐구 이 비겁 자야! 너 때문에 나는... 윤토형은..... 그러고 보니 그 형 요새 뭘 하지? 학교에서 본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진영이는 알까? [..진영, 윤토형 요새 뭘 해?] [윤 선배하고 한 판 뜨셨다. 결과는 입원.] 나는 화들짝 놀랐지. 벌떡 일어났어. [어..어디?] [요 앞에 홍익병원.] 술기운이었나봐, 나는 애들이 놀라서 쳐다보는 것도 놔두고 한 달음에 계단을 뛰어 내려왔지. 뒤에서 발소리가 들 리고, 조금 있으니까 진영이가 쫒아와 내 어깨를 잡았어. [현우!] [...나, 병원 갔다 올께.] [몇 호실인지 아나?] [...에엣,,;;;;] [나를 따르라.] [.....애들은?] [금방 돌아오지 뭐.] [.......미안, 나 제멋대로지......] [절대 아냐. 네가 이렇게 적극적인 행동 하는 것 드문 일인데, 지원사격을 해 줘야겠쟎나?] [...고마워.] [........짜식, 착해빠져서.....] [엥?] [아냐.] [...저어, 꽃 사 가야 하지 않을까?] [무슨 잘 된 일이라고 꽃이냐. 게다가 요즘은 국화밖에 없는데, 그런 거 사 가긴 뭐하지?] [왜?] [국화는 의미가 안 좋아.] [어, 그런 것도 알아?] [나 꽃말에 민감하거든.] [..진영, 의외로 섬세한 데가 있네.] [의외라니, 섭섭한데. 나같이 다감하며 서정적이며 또한 여린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과연 그럴까?] [알 수 없지.] [하하하^^] / [푸하하하핫^^] "Bitter" 11. "Bitter"-11. 2000.02.11. by saroni 진영이는 목례만 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윤토형은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훌륭한 미이라가 되어 있었지. 다리 한 쪽 팔 한 쪽 기브스, 몸에 얼굴에 붕대 칭 칭. 나를 보더니 말을 더듬었다. [앗, 현우야, 앗, 엇..] [..윤토형.] 음...막상 와 보니 되게 할 말 없더라. 그냥 둘이 얼굴 피하며 방 안만 한 바퀴 보는데, 꽃병에 노란 국화가 꽃혀 있었다. 다 시들었다. ...역시 꽃 사 올 것을. 입원한지 꽤 되었던 모양이다. [언제 입원했어요?] [음, 그, 그....] 얼굴이 벌개졌다. 으음, 나 강간한 날 당장 산이 찾아가 싸웠나 보다. 윤 산, 그 천하에 악랄한 놈, 그래도 한 때 친구였는데 사람을 이렇게 성한 데 없이 만들어 놓다니. 윤토형은 끄응- 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현우야, 정말 미안하다. 진짜 미안해.] [.....뭐가요.] [망할, 망할,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정말 죽어도 할 말이 없다. 미안허이. 그런데 너 그 새끼랑 헤어졌다면서.] [형 때문이 아니예요. 제가 결심했지요.] [....그래, 잘 했다. 그 변태 자식, 호모새끼. 그런 놈한테 기집애처럼 엉덩이 대주고 그렇게 살면 안 되지.] .............. 뭐, 뭐야..? [..........] 내 표정을 보았는지, 윤토형은 으음, 하고 기침을 했다. [아냐, 잘 생각했다고. 정상이 아니쟎아 그런 거. 어떻게 남자끼리 ...그러니 은수도.. 자살할 정도였겠지.] .......당신도 나 안았었쟎아? 아아, 이 사람, 완전히 상황을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군. 즉, 자기는 은수 좋아한 거 아니고, 은수는 남자끼리니까 당연히 자기한테 관심 없었던 거고, 결국 은수는 강간당한 것이며 즉 산이가 나쁜 놈이라 이거지. 자기는 악과 맞 서 복수를 결행하는 정의의 짱? 우와 편하다. 슬슬 열이 받으려 하는데, [그래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 죽겠다 현우야.] [...........] 하긴,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런 식으로 왜곡해서 생각하고 억눌러 버리지 않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견디고 있 겠어 지금. ..아마, 사람들은 이래서 네오나찌가 되고 호모 혐오자가 되고 여성을 비하하며 심지어는 정치가 같은 것까지 되는 것이겠지. 자기 약한 점, 실패한 점을 똑바로 들여다보기 싫어서 말이야. 과잉으로 껍질을 둘러 절대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하겠지. 가엾게도. [..내가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어. 네가 너무 예뻐서 여자로 착각했나 보다. 정말 미안해. 그런데 이렇게 병문안까 지 와 주고....... 은수 복수만 아니면 내가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은 거여.] [.....그, 그런 소리 말아요, 형!] 콧등이 찡했다. 뚝! 강현우!! 울지 맛! [형.. 은수도 죽었는데, 형까지 그러지 말아요 제발! 나... 은수 때문에 얼마나.....] [씨펄.. 고맙다. 착한노무 짜식.] 말이 잘 나오네 술술. 이래서 마시는가 보다 술. 평소 차마 이성이 쪽실려 해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미친 척 하고 해 보기 위해. 우리는 같이 담배를 피웠다. 내가 가져온 말보로 레드였다. [빌어먹을, 갸는 죽어버렸는데도 이노무 담배는 왜 이리 맛이 있다냐?] [...그렇죠...] 내가 형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내가 사람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들어주는 것 밖에 없다. 그래, 정호가 말했듯이, 그게 내 재능일지도 모른다. 설마 나한테도 잘하는 점 하나쯤은 있겠지...... 윤토형의 뒤틀린 자기 위안들을 들었다. 오 괴로웠지, 이 사람은 잊어버린 것 같지만, 난 변태새끼 윤 산과 놀아났 던 호모라구. 헤어졌다고 끝난 일이 아니야, 그 애가 지금의 나이고 또한 미래의 나이지. 내 주머니엔 산이가 준 라이터가 고이 있었으며, 형이 욕질을 할 때마다 그냥 죽고 싶었다. 하지만 온 몸의 주파수를 형에게 맞추고, 귀 기울였다 귀 기울였다...... 알려 주고 싶어. 내가 여기 있다고. 늘 기억한다고. 나와서 노래방에 갔어. 애들은 꽤 술이 거나해졌고, 만사가 온 세상이 마냥 즐거운 모냥이더라. 난... 울적했어. 윤 토형이 감추려 애쓰던 고통이 나에게 몽땅 쏟아져 들어왔기를, 그것이 내가 바랬던 것이지만, ...괴롭더군. 난 형이 내가 게이란 것을 인정해 주는 줄 알았었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 나 남자만 좋은가? 여자앨 좋아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윤 산이 좋았어. 그녀석한테 욕망을 느꼈어. 말하자면 그넘이 내 첫사랑인 셈이겠지. ...내가 반 하고, 그놈이 찼다.....여기서 스탑. 삼천포다... 단지, 그 녀석은 여자랑도 많이 잔다. 응, 내 생각도 그런 식이야. 세상에 이렇게 인간이 많은데 그 중 꼭 자기와 다른 성을 좋아하게 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난 그 새끼가 남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로 좋아했을 것 같아. 남 자 여자를 떠나 인간으로서 말야... 하지만, 윤토형 말을 듣고 나니, 사람들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어. 하긴 나도 '나는 남자야!'라고 몇 번 이나 되새기며 사회에서 규정한 패턴을 따르는 걸. 내가 잘못된 걸까? ...힘들다. 저기 저 놈들 생각은 어떨까? 앞에서 정호와 서래는 툭탁거리면서도 잘도 붙어앉아 있더군. 술이 들어가서인지 오가는 눈빛들이 애처로왔어. 정 호가 노랠 부르면 서래는 반짝이는 눈을 하고 쳐다보지. 절정부에서 정호가 악을 쓰면 눈을 깔면서 미소를 지어. 그러다 혹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농담을 하며 스윽 딴 델 보더군. 서래가 마이크를 잡으면 정호는 찌푸리며 화 면을 응시해. 과연 화면에 나오는 산과 들을 저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일까? 서래가 노래를 마치고 나면 필사적 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어. 둘이 저토록 나란히 앉은 주제에, 행여 몸이라도 닿으면 눈에 보이지 않게 살짝 떨어져 나가더라구. 양 쪽으로. 노래들도 의미심장했지. '사랑일 뿐야'랑 '내 사랑 내 곁에' 까지는 그런가 싶지. 그런데 술기운에 간이 탱탱 부어 '인형의 꿈'이나 '친구와 연인 사이' 같은 걸 부를 때는 내가 아슬아슬해 죽겠더라. 하지만 다른 애들은 그러려니 하겠지. 미지의 여인을 갈망하는 노래이려니 하겠지. 어른들은 저것들이 뜻이나 알면 서 저런 노랠 부르나 하겠지. 그리고 저 녀석들도 모를 테야 그것이 서로를 향한 노래인 줄을. 미치겠어....그냥 말을 해 줘 버릴까? 그러나 절대 한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일이 없었어. 끝에서 세 번째에 정호는 드디어 소원대로 개나리 송을 부르고야 말았어. 야 이 쉐끼 뭐냐고, 다음 곡으로 넘겨버 리라고 애들이 입을 모아 비난했지만, 놈은 꿋꿋이 그 동요를 부르더라구. 아무도 같이 마이크를 들지 않았지, 그 때에서야 서래가 빈 마이크를 잡더니, 화음을 넣는 거야. ....멋진 앙상블이었다. 슬프도록 조화로웠지. 그제야 그 혁명적으로 단순한 음이 노래방에서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 고, 웃던 아이들이 잠시 조용해지고, 우리는 함께 들었더랬어 그 애타도록 짧은 노래를. 수상한 무드는 없었지만, 모두들 추억에 잠기는 분위기였지. 옆에서 진영이가 속삭였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하지만 정호와 서래,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던 걸. 그 노래를 부르고 나서, 서래는 긴장했던 것인지 아니면 술이 늦게 도는 타입이었던 것인지, 암튼 슬슬 소파에서 늘어지기 시작하더니 그냥 뻗어버렸어. 파장하고 아이들은 다들 집엘 가는데, 서래를 이대로 집에 가져가면 놈은 아버지에게 맞아서 다음 날 해를 보지 못할 듯 싶었지. 진영이가 말했어. [정호 네가 업어라.] 정호는 버얼개졌어. 으음, 안 그래도 술 취한 얼굴에 더 빨개질 여지가 있었다니, 정호는 저런 자기 얼굴을 매일 보다 보면 당연히 온 세상이 원색으로 보이리라. [실허! 내가 왜 그걸 어어야 하은데?] [이런...혀 꼬인 거 봐라.] 진영이는 혀를 끌끌 차더니, 덥썩 들어올리더군. 짜식도 얼굴이 발그레한데 말야. 내가 제일 멀쩡한 듯 싶어. [저어..내가 술 제일 적게 마셨으니까 내가 업을래.] [됐다 임마.] [나도 업을 수 있어!] 그러자 진영이는 군소리없이 넘겼다. 그런데....우 쒸.... 쪼그만 놈이 왜 그렇게 무겁냐? 나는 비틀비틀 하면서 쪽팔 려 버렸지. 그런데 진영이는 아무 말 없이 [현우, 가방이 그 놈보다 더 무거운걸, 그러니 이걸 들어줘라.] 라면서 내 체면을 살려 주더군. ...하긴, 가방이 무겁긴 꽤 무겁더라. 여기 든 게 다 교과서인가? 하긴 서래 이 놈이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데. 끄응 하고 가방을 드는데 앞주머니에서 뭐가 툭 떨어졌어. 보니까 수첩이야. 일단 급한 대로 그걸 손에 들고 진영이를 따라 공원으로 향했지. [으웩....] 이건 정호가 오바이트 하는 소리라네. 짜식, 술버릇이 꼭 김정호 답더군.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시비를 걸다가 진영 이한테 한 대 맞고, 그러더니 곧장 피자를 한 판 굽더군. 진영이가 그 놈 씻기러 공원 화장실로 간 사이에, 나는 서래를 벤치에 내 허벅지에 눕혀놓고 지키고 있었어. 음...누구를 돌보아 준다는 것,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구나. 얘 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 새로운 경험이었다. 헤헷^^ 그런데 손에 걸기적거리는 것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서래 수첩이쟎아. [................]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지만...... 보고 싶어....ㅠ.ㅠ!!!! 혹시 정호 얘기가 쓰여 있을지도 모르쟎아? ............에잇! 미안해 서래야, 잠깐만.. 간헐적인 몇 마디가 일기식으로 쓰여 있었지. J가 이러했다 J가 저랬다 등등. 그리고 서래는 정호에게 완전히 환상 을 투사하고 있더군,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라나, 무슨 랭보처럼 숭배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무서울 지경이었 어. 정호가 "서래를 세상에서 제일 믿는 편이야 그나마" 란 말을 한 마디 했다고, 일주일 내내 해피해피더라. 뭐라 는 줄 알아? <30일/ 얼마나 희석된 표현이란 말인가! 고고한 녀석. 그 마지못해 툭 던지는 말 하나로 어얼마나 행복한지 몰 라....으아, 역시 포기할 수 없어. 처음 본 때는 봄이었다고 기억이 나. 노랑 개나리 꽃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던 J. 하지만 녀석은 실제로 그 자리 에 있는 것이 아니었어. 뭐에 쫒기는 사람처럼, 옆에 보는 내가 숨이 찰 정도로 스케치북을 채우더군. 내가 왜 그 걸 보자고 했을까.. 정호 그림, 오 맙소사. 그 때 걔는 아직 미술을 배운 적도 없었어. 뿅 간 내가 말을 걸었더니, 고양이처럼 털을 세웠지. 그리고 친구 따위는 필요없다는 말로 나를 약오르게 만들어 놨어. 그게 시작이야. 일단 난 그 녀석이 그림을 시작하도록 끌어들였지.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가르쳐 주었지. 처음에는 승부욕이라고 생각했어 .... 녀석은 온 세상을 비웃더군. 그래서 난 정복욕이 바짝 올랐지. 지금까지 내가 친구로 만들고자 해서 내 그물을 벗어난 놈은 하나도 없었다구! 한 순간도 놓아두지 않고 나는 그 놈을 그 놈을 그 놈을 생각했어. 추구했어. 온 신경을 집중했지. 날 믿으라고 행동으로 외쳤지, 그 녀석이 해 달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다 해 주었어......무슨 자기 최면에 걸린 것 처럼, 홀린 것 처럼. 그만큼 탐이 났어 그 애가. 그 때 알았어야 하는 건데. 반 년 쯤 지나니까 겨우, 결국 녀석은 계단 꼭대기 같은 은밀한 곳에서 나에게 자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어. 그렇게 상처입기 쉬운 녀석은 처음 봤다. 상처입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두꺼운 갑옷을 두르고 있어. 그렇게 자기가 매력적인 걸 몰라. 바보 같으니. 오는 사람들 다 째려봐서 쫒아내고. 그러면서 사람을 믿지 못하겠 다고 투덜투덜이라니. 내겐 좋아......아무도 그 녀석 곁에 있지 못하게 하고 싶어. 8일/ 힝.... J가 현우형이랑 점점 친해지고 있다. 나한테 하지 않는 얘기들도 하는 것 같아. 현우형 미워...ㅠ.ㅠ 난 왜 이렇게 속이 좁을까... ㅠ.ㅠ> 미..미안해 서래야....ㅡㅡ;;; <5일/ J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실천했더라면 지금쯤 어떤 파멸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지? 그 고집센 놈, 멋진 양면성. AB형은 정말 곤란해.. 소강상태. 아무리 봐도 J는 진짜 천재다. ...헤에, 짜식은 어디까지 발전해 나갈 까? 이젠 내가 아무리 연습해도 따라갈 수가 없다. 돌아버리시겠다. 내가 미쳤다고 그놈한테 그림 그리라고 난리를 쳤지! 아아-- 그냥 놔둘 걸. 내 아래 있었어야 하는 건데!! 3학년 미술 담당의 민 선생님이(디게 유명한 판화가다.) J한테 자기 학원으로 오라고 그랬대. ...민 선생님, 나랑 더 친하면서, 장난도 잘 걸고 그러시면서, 나한텐 왜 그런 말씀 안 해 주고.. 그놈한테만.. 진영이형은 [너 공부 잘 하니까 미술 안하겠구나 싶어서 그러시는 거야.]라고 위로 해 주지만, 잠이 안 와. 역시 자기 전에 융을 읽어치워야 겠다. 요샌 책만 먹고 산다. 도피도피도피. 훗, 머리 속에 든 걸 끄집 어 내 보면 별 것도 없을 텐데. 그러니 이 따위 의미 없는 글귀만 줄기줄기 늘어놓고 있겠지. 우스워. 상식이란 거 나 좀 더 익혀서 둘러야겠다. 난 예의바르고, 속 깊고 그릇 크고, 인격이 빼어나고,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잘 살 거야. 행복하고 싶어. 8일/ 와*^^* J가 너바나 시디를 사달라고 조른다. 헤헤^^ !! 근데 돈이 없따...남아도는 그놈의 참고서를 헌책방에 팔아치우면 돈이 생길까 ㅠ.ㅠ J 눈엔 내가 봉으로 보이겠지. 그래도 .....좋은걸...... 그 놈이 잠시라도 기뻐하면 고맙 다는 말 못 들어도 진짜 행복하다. 이런 식으로 중독시켜 놓다니, 나아쁜 놈. 엄마한테 친구 집에서 자고 오면 안 되냐고 했더니 역시 야단맞았다. 그 놈과 밤을 샐 수 있는 날이 올까? 온다 해도 별 일이나 있을까? 12일/ 치과에 갔더니 이빨 안 뽑는다고. 내가 날을 잘못 알았나 보다. 근데 의사랑 얘기도 나누고 내 사교성을 발 휘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들이닥친거야. 꼭 이빨 뽑으면 죽는 것 처럼!! 걱정해서 보러 온 것은 좋아요, 그런데 오 늘 아니라니까 다짜고짜 커다랗게 소리치고, 선배 티 내면서 의사 혼내고, ,,,,,제길, 특별취급도 과보호도 싫다. 난 아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쪽팔려서 눈물이 다 나오더군. 저번엔 학원 등록하는 데 엄마가 꼭 같이 가겠다는 거야, 내 나이가 몇인데!! 애들한테 얼마나 쪽실린지 알아? 그래서 엄마한테 화 냈더니 엄마가 울고.. 아 내가 미쳐. 제발 알아서 살게 좀 놔둬! 라고 생각했지만.....사실 엄마아빠가 없으면 난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 것도 못할지도 모른다. 우울해져서, J가 너무 보고 싶었어, 그런데 삐삐쳤더니 여자애랑 만나고 있대. 능력도 좋지. 하긴 그렇게 미남인데 말야. 최근에 사귄 여자애 얘길 할 때는 미치겠어. 하루 종일 그 얘기만 하는걸.. 난 얼마나 괴로 운지 짐작도 하지 못하면서. 가끔 그 놈이 훌쩍 떠날까 봐 불안해질 때가 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 아. 18일/ 어른들 오시다. 사촌동생이 J를 꼭 닮은 게 귀여워서 한참 데리고 놀아줬다. 불만스런 표정 뿐 아니라 그 비 바람 몰아치는 성격이 똑같았다. 어릴 때 하던 천막놀이. 모체귀소본능, 의자들에 이불 걸치고. 역시 서래야 라고 숙모님이 칭찬하시더군. 그래, 난 역시 서래야, 그러니까 용돈이나 주세요. 체, 어른들.. 얘기 들으러 가면 날 평하 고 + 훈조가 되어 버린다. 사람이 앞에 뻔히 앉아 있는데 왜 그딴 말들을 하는 거야? 아버지랑 얘기했다. 부비부비 하면서 [앗, 아빠다, 아빠쟎아.]라는 계산적 대사. 덕분에 오만원 탔다. J한테 뭘 사 줄까? 실연당하면 노래방 가서 'J에게'나 부르면 되겠네^^;; 25일.. 쓰는 것, 귀찮을 뿐더러 허무해 죽겠다. 결국 외롭고.......몰라! 이제 질렸다 이거야.> 그리고 @@;;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빨리 죽고 싶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잘거야!! 꿈에도 그넘이 나올텐데! 세제 라도 마셔 볼까?> 하고 피칠이 한 페이지 전체에 되어 있는 거야. ...세상에, 이 애가 이렇게나 암울한 놈이었단 말인가? 나는 이게 정호 수첩이 아닌가 하여 맨 뒤를 들쳐 보았지만, 전서래의 것이 맞아버렸다. 정말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다. 서래마저도 죽고 싶어 하는 구나. 한 때 세 상에서 나만 괴로운 줄 알았던 것은 얼마나 자만이 가득한 생각이었던가. <본 조비 노래 중에 "If I Were Your Mother"란 노래가 있쟎아. 이제 그 뜻을 알겠어. 차라리 J가 내 아들이라면 좋겠어. 언제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어. 내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떠나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매처럼 늘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준다면..! 차라리 내가 그애였으면 해. 내게 모든 걸 말해주길 바래. 내가 해 주는 1%만큼이라도 해 준다면. 내가 중요하다고 말을 해 준다면. 언제나 던지는 일갈, 혹 은 술취한 내가 응석부리듯 하는 애타는 질문에 '대답'만 차갑게 하지 말고, 말을 해 준다면. 하여 나를 언제나 되씹게 하지. 그 녀석이 여자라면, 당장 말할 수 있을 텐데. 단지 여자이기만 하면!! 아니면 내가 현우형처럼 미인이기만 해도 어떻게 해 볼 텐데. (?ㅡㅡ;;?)그리고 지쳐 뻗어버릴 때 까지 쫒아다니면서 애원할 수 도 있을 텐데. 누구보다도 아껴줄 텐데. 내 것이기만 하다면, 뭐든지 해 줄 텐데. 정말이지, 가라앉는 배에서 내 구 명복을 벗어줄 수도 있단 말야, 그리고 내 부모님과 그 녀석이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다면, 그 녀석을 구할 거야. 그 애를 위해 죽고 싶어. 차도의 중앙선 위로 걸어가며 뽐내는 녀석의 뒤를 쫒아가며 경찰 아저씨에게 죄송하다고 비는, 언제나 그런 사람 이 되고 싶어. 보고 싶어. 얘기하고 싶어. 녀석의 찌푸린 얼굴을 보면서 그 목소리를 들어주고 싶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싶어. 언젠가, 밤새도록. 하지만, ....안 하겠지? 난 그럴 용기가 없쟎아. J를 얻기 위해 내게 운 좋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릴 수 있 을까? 상상을 해 수많은 상상을. 그러나.. 조그만 구체적 실천도 없이. 내가 만일 J와 사귄다면, 아빠랑 엄마가 뭐 라고 하겠어? 나만 보고 사는 우리 부모님인데. 집에서 쫒겨나겠지.. 우리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그 녀석과 나를 외면할 것이고, 모든 문들이 우리 앞에서 차갑게 닫힐 거야. 결국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겠어 우리가? 위를 보면 내게 약속된 화려한 수정 계단이 보여. 올라가라고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아래를 보면 균열 사이로 깊은 물이 보여. 검고, 바닥이 보이지 않지.. 한 발만 디디면 빨려들 것 같은데, 끈끈한 색으로, 그 안에 일단 몸을 넣으면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을 익히 짐작할 수 있지. ..그래, 그런 불안감이야: 노상 2등인 나의 시험 때 기분. 조금만 더 하면 1등이 될 수 있어, 그렇지만, 조금만 덜 하면 금방 뚝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거야. 8등 12등 25등 심지어는 50등..! 아주 순식간에. 딴 애들이 내가 J를 멍하니 생각하는 시간에 공부를 하 고 있겠지 싶으면 식은땀이 배지. 시험 볼 때도 안절부절, 분명히 암기하고 있는 단어인데 호옥시나 생각이 안 나 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결국 시험 보는 날 아침 화장실에 박혀 컨닝 페이퍼를 만들고야 마는, 이 비겁자를 제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그 순수한 녀석, 아니면 아닌 거야! 그러니 안해! 라고 외치고 세상에 항거하는 그 놈이.. 왜 좋아하겠어? 그러니 내가 뭐라고 말을 하겠어? 하지만 난 오늘도 말을 해: 날 믿으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나 봐.> . [[어허, 자네 뭐하나 지금.]] 진영이였다. 나는 황급히 수첩을 덮고, 머쓱해 버렸다. 남의 수첩이나 들여다보고, 진영이는 이러지 않을 텐데. 하 지만 내 머리를 톡톡 쓰다듬는 것은 진영이였다. [얘들 일 너무 걱정하지 마.] [..으응. 정호는?] [서래를 제 집에 데려간다고 고집을 잔뜩 피우더니 삐져서 휑하니 가 버렸다.] [데려다 줘야지..! 혼자 보내면 어떻게 해..!] 나는 벌떡 일어났다. 진영이는 웃으면서 [자네는 남의 일이라면 무척 적극적이네. 걱정 마, 녀석 집 바로 앞이야. 저기 저 아파트.] [그럼, 이 남은 시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묻자!] 그러자 서래가 벌떡 일어나 [너무해~~!!]라고 한참 갖은 난리를 피우고, 다람쥐처럼 눈을 비비더군. 날 올려다보며 방글*^^* [에헤헤, 현우형 엄마 같다. 진영이형은 아빠?] 하면서, ㅡㅡ;;; 애가 되어 버렸다. 진영이는(작가 주: 매우 당황하면서) [짜샤, 헛소리 말고 빨랑 일어낫!] 하고, 사 로니는 쓰면서 유치해서 죽을려고 하더군. 하지만 귀여웠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놈 치곤 너무 맑았다. 내게 손 을 쭉 뻗더니 [헤헤헷, 헤헤, 기분 좋아.] 하고 [저엉호 어디 갔어?] [집에 갔다.] [씨이....나쁘다.] [너도 가야지, 일어나.] [형, 나 정호 보고 싶어. 데려다 줘어....에엥...] [요놈, 빨랑 좀 정신 찾엇!](찰싹!) 서래는 잠 깬 아이처럼 울먹거리고 또 칭얼거리고, 진영이는 한숨을 쉬며 [콜 자길래 술버릇이 좋은 줄 알았더니 깨어나서 떼를 쓸 줄이야. 웃고 울고, 이제 곧 오바이트한다.] 진영이가 말하기가 무섭게, 말씀이 현실이 되더군. 우리는 동전을 탈탈 털었어. 합계 천사백원. 서래에게 초콜렛과 사탕을 먹이고 껌을 씹게 했어. 냄새 없애려고. 그 게 무슨 효용이 있었는지는 내일이 되어 봐야 알겠지. [과연 괜찮을까?] [알 수 없지. 현우, 이거 너 먹어.] [넌?] [내 경우는 이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것 만으로 칭찬 들을걸? 괜찮아.] 후아...고민 많은 우리, 대책 없는 우리들, 앞 뒤 생각없이 일 저지르고 보는 우리들. ....실은 생각이 너무 많은 우리들. .............하아아.........녀석들 같으니라구................. 하지만, 고삐리 때 이 정도는 해 봐야지 않겠어? 이런 걸 청춘이라고 하는 게야. 처음 피운 담배맛처럼, 처음 마신 술처럼. 쓰디 쓴데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지. 살아 남을 수가 없다구. 쓴 맛이라도 느껴야 우리 여기 있다고 확인할 수 있단 말야. "Bitter" 12. "Bitter"-12. 2000.02.12. by saroni 오늘은 진영이가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우리 주위엔 아파트가 잔뜩 있었지: 무슨 숲 처럼. 그리고 해 없는 때에 응당 그렇듯이, 여전히 색상이 없는 침침한 그림자들이었다. 진영이가 말했다. [쟤들, 그냥 알려 주는 편이 낫지 않나 싶어.] [....조금 더 두고 보자.] [문제가 생겼으면 해결을 해야지. 그냥 모른 척 웃고 지내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근본적으로 처리할 건 처리해야 않 겠냐.] [.....모르겠어, 그러다 잘못될 지도...] [내가 악역을 하게 되어도 좋아, 저런 건 답답해서 못 본다.] [놔두자.] 난 진영이를 똑바로 보면서 고개를 저었지. 안 돼... 너무 뒤틀려 있어. 너는 모르겠지, 사회의 시선이라는 것? 그렇 게 쉬운 게 아니야. 왜 사람은 자기 좋은 대로 살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일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겠지. ,,아아, 그렇지만 사회 속에 인간이 있는 것일까 인간이 모여 사회가 되는 것일까. 그래, 저 애들이 다른 무엇 보다도 서로가 소중하다면, 선택을 하겠지. 그럴 용기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무게 없는 감정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아. 진영이는 날 가만히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피식 웃었지. 진영이는 걱정하는 스타일과 문제 대처법이 말야 [꼭 아빠 같다.] [...그럴 지도 몰라. 서래 보면 화랑이 생각난다.] [에? 신라시대 화랑?] [아니... 표 화랑. 살아 있다면 벌써 세 살이라네.] 음.. 진영이의 그림자. 가로등 불에 비치어 길다랗다. 내 친구 녀석들, 이 예쁜 녀석들은 정말 알면 알수록 겉으로 보이는 것 하고는 너무 달라. 그래서 그 간직한 쓴맛이, 정말 슬프도록 사랑스러워. ......그리고 섹시해. 허거걱!!! 나 , 나 ,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 하지만, 암울에 잠긴 진영이 옆모습은! 갑자기 너무 멋있어 보이는 거야!! --- 우와, 진짜 섹시했다 그 입술선. 황 금빛 노란 가로등에 비친 그 바알간 뺨, 잘 빠진 몸. 난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 [현우?] [...아, 아, 아냐...] [...? 걱정하지 마 임마.] 짜식이, 남의 속도 모르고 버릇대로 내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웃는 거야. 으윽.. 그 터치, 그 보조개, 그 야시런 삼 백안, 너무 자극이 강했어! 나 술 취해서 이러나? 금욕 기간이 너무 길었나?? 안돼!!! 얘는 내 친구란 말야! 세상에 몇 없는 친구!! 젠장, 망할, 이럴 수는 없어.. ! 얘는 진영이라고! 하지만 왜 이렇게 곱지? 난 짐승이야아....ㅠ.ㅠ 표진영은 내 표정을 단단히 오해하고서, 서래와 정호는 그냥 놓아 두겠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하더군. 난 응, 응. 하 면서 진영이 얼굴을 다시 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 온 몸이 바싹 곤두서 있는 게 잘 느껴졌거든. 그리고 아, 안녕! 하고 허둥허둥 집으로 들어갔어. 안돼! 절대 안돼!!! 내려갓! 내 머리 속에서 나가! 이 더럽혀진 수컷을 악에서 구해 주십사 하고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사자림님께 기도드리며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햇살 아래에서 두근거리며 진영이를 보았을 때, 휴우... 평소 그대로였어. 표진영, 믿음직한 친구, 형 같은 놈; 아아, 다행이다 다행이다..ㅠ.ㅠ 역시, 어제는 알콜의 작용이었던가 봐. 진영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틈이 없었어. 서래가 도깨비불을 잔뜩 달고 회색 얼굴을 하고 들어왔거든. [안녕, 나 오늘 미술부 마지막이야.] [에?] / [왜?] / [뭐야?] [헤헤............... 나 아버지한테 학살당할 뻔 했어 어제. 이제 고 3도 다 되어가니 취미생활은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 하래. 그래서 지금 학원 가야 한다.] [시팔, 뭐가 어째? 니네 아버지 정말..] -> 벌떡 일어선 정호. [....에엣...] -> 수첩에서 읽은 것들을 상기하는 현우. [하란 대로 할 거냐?] -> 도끼눈을 하는 진영. [응.] 서래는 고개를 끄덕였어. [어차피 나 재능도 별로 없쟎아. 공부나 할래. 미술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너, 그림 좋아하쟎아.] [헤헷, ....그림 잘 그리는 의사가 되면 되지.] ...할 말이 없다. ...맞는 소리겠지. 그렇지만..... 어쩐지................ [시팔 젠장, 이 파파보이 같으니.] 정호는 성질을 부리고는 미술실을 나가 버렸어. ...................슬퍼!!!!! 서래는 그냥 힘없이 웃더니, 암 말 없이 자기 이젤 앞에 앉았지. ...나중에 그릴 수 있겠지,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넌 '지금' 그림을 그리고 싶을 것 아니냐. 우리 십대는 한 번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그러다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난 암울복잡과다한 내 사고 과정을 다 이야기하질 않기 때문에, 애들은 가끔 내 말에 당황하곤 한다. 서래가 지금 그렇다. [헉...현우형, 너무 과격한 설정이에요.] 그래, 넌 그런 일이 너에게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삼풍 백화점도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도, 설마 너에게 일어나겠냐 싶겠지. 보장된 미래만이 보일 테지.. 하지만, 은수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을 거야....얼마나 착하고 평범한 애였는데. 그렇지만, 어느 날 하늘에서 검은 손가락이 내려와 우리 중 아무나 집어간다고. 아무 예고도 없이, 완전히 무작위로. 우리의 사정은 생각해 주질 않아. [....그럴 리 없어요. 다시 그림 그릴 수 있을 때 까지, 꼭 살 거야.. 다시 하고야 말 거예요.] 서래는 코를 훌쩍였어. 하지만 울지는 않았지.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것 없쟎아요. 조금 나중에 하는 것 뿐인데....라고 아빠가 , 그랬지... 맞는 말이쟎아요.] [응..] 나는 과도하게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니, 객관적 평을 내릴 수 없겠지. 확신도, 충고도. [.....나, 그림 정말 좋아해요. 그림을 그릴 때가 어느 때보다 행복해. 평안해. 하지만.. 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 축복받은 일부이고.......... 정호처럼.] 서래는 빈 이젤을 쳐다보았다. [걔는 진짜 재능이 있으니까. 난 그림 그려 먹고 살 자신이 없어, 내 재능에 대해서. 정호가 반 년만에 가뿐히 추월 해 버렸을 때: 질투도 많이 했지만, 진짜 절망해 버렸지만 뭐... 할 수 없는 일이쟎아요. 바라는 거라면, 짜식이 내 대신 화가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녀석이 그림을 업으로 삼는 게 옳지요. 그리고 진영이형도 현우형도, 재능이 있고 그리고 집에서 허락해 주니까. 난 정말 내게 확신이 없어요, 집의 반대 에 맞설 만한 신념은 없어. 차라리 이 어설픈 그림 가락이 없었더라면, 아니면 딴 걸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헤헷^^ 하고 서래는 방그레 웃어서 밑의 표정을 싹 감추어 버렸다. [그래서, 누가 내 유품을 가져갈래요? 4B연필 한 다스, 칼, 수채화 물감, 파렛트! 경매 붙일까?] ....아아, 저런 표정은, 정말 괴롭군. 사람이, 저렇게 웃는구나. ......그래서 인간은 동물 중 유일하게 웃을 수 있도록 진화되었는지 모른다. 유일하게 고통을 알고, 사회에서 자기 원을 포기하고, 그 쓴 맛을 견디기 위해 웃어내는 동 물로.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다. ...그래, 산이가 저렇게 웃는군. 항상 거짓되이 웃지, 거짓말만 하지. 그걸로 우월감을 형 성하며 세상을 빼앗으며.......그 녀석은, 뭘 버티어 내려고, 그 따위로 표정을 연기하는 법에 숙달해 버린 걸까? 산..... 내 서래, 동그랗고 고운 서래가 윤 산처럼 웃는 걸 보니 너무 괴로웠어. 재능이라고? 에디슨이 그랬쟎아 99프로의 노력이 어쩌구.. 우리 중에 너만큼 노력하는 놈이 없었는데, 넌 미술학원도 다니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잘 그렸쟎 아..! 그런 노력은, 성실함은, 재능이다. 정말 갖기 힘든 재능, 타고 나는 거야. 정호를 봐, 미술에 소질이 있을는지 는 몰라도, 얼마나 제멋대로에 말 안 듣고 게으르냐고. 1프로만 믿고 남의 충고 절대 안 들으며 안하무인에 끝까지 그리는 그림을 찾아보기가 힘들지. 결국 끝에 가서 이기는 것은 누구일까? [서래야, ...노력도 재능이야.] 난 위로한답시고 알 수 없는 말을 해 버렸지. ...그런데, 끝은 또 뭘까? 이렇게 생각하는 현재도, 흘러서 과거로 가 버려. 다가올 미래는 현재가 되며 다시 과거가 되겠지. 그러면 끝은, 우리 죽을 때를 말하는 거야? 최소한 죽을 때 후회 없기를 바라보며 우리는 쉬지 못하고 앞만 보며 달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서래는 계속 웃었다. [고마워 현우형^^] [네 화구, 이 형이 보관하고 있으마.] 라고 진영이가 말했지. [나중에 찾으러 오겠지, 전설의 사나이니까.] [응!!*^^*] 서래는 활짝 웃고 과감히 미술실을 나갔어. 그리고 다시 얼굴을 문짝 사이로 들이밀더니, 개나리 꽃 처럼 활짝 웃었어. 노란 얼굴을 하고. [인간이 보는 시점에서의 정의가 맞아.] [응??] [닭과 달걀 말야. 정호한테 내가 그랬다고 전해줘.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 사회에서 규정해 준 것이 아니면 결국 실제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비죽비죽한 머리통은 사라져 갔다. 그 날 정호는 미술실에 돌아오지 않았다.